농익어가는 시기

널 뛰던 활자들

by 파이어

전철 옆자리에 중년의 여성이 스마트폰을 열심히 보고 있었다. 너무 뚫어져라 보는 그녀가 눈에 들어와 그녀의 스마트폰을 슬쩍 곁눈질하여 보자, 글씨의 크기가 눈에 확 들어왔다. 중년 여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보고 있었다. 집중하며 글을 읽어 내려가는 그녀의 모습이 쉽게 잊히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횡단보도에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누군가가 손을 흔들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중 누군가에게 손을 흔드는 것이라 생각하며 신호등을 응시했다. 손을 흔들던 그 사람은 아예 두 팔을 위로 치켜들고 세차게 흔들고 있었다. ‘창피하지도 않은가 누구에게 저토록 열심히 손을 흔들까? 꽤 친한 모양이네.’하며 내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무도 그 손짓하는 사람에게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뭐지?’ 그때, 신호등이 바뀌어 길을 건너는데 건너편 그 사람이 지나가며 내 왼쪽 팔을 세차게 때렸다. “야!” “헉! 언니!” “뭐야?! 안보였어?” 건너편에 그 사람은 나랑 친한 지인이었다. 그 언니 손에 잡아끌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뭐야? 안보였어? 나 완전 미친년처럼 손 흔들었는데. “ “안보였어, 언니인 줄 몰랐어, 미안” “뭐여, 노안이야?!” 화들 짝 놀라기도 당혹스럽기도 한 나는 ”그……그런가 봐. 진짜 몰랐어. 나는 뭔 사람이 부끄럽지도 않나 팔을 있는 대로 흔드나 했어, 그게……언니였네.” “안과 가봐, 노안이 시작됐네.” 절망적이었다. “나도 그랬어, 건널목 건너편에 있는 사람 얼굴이 안보이더라고, 그게 시작이었어.” “응, 미안, 나 늙었네.” “다 늙어.”

며칠 전부터 상품 뒤에 성분표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때는 그냥 피곤한가 하며 무심코 지나쳤다. 생각해 보니, 성분표뿐만이 아니라 상품 가격표, 화장품 설명서, 책의 활자들이 흐릿했다. 서둘러 안경점에 가서 시력 검사를 했다. 노안이었다. 눈이 늙어 버렸다. 돋보기를 사들고 집으로 왔다. 씁쓸했다. 스마트폰의 글자가 널뛰던 것들의 이유를 알았다. 안경을 끼고 스마트폰을 보니 널뛰던 활자들이 차분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런 거였군.

“띠리릭” 문자 메시지에 알람이 울렸다. 책상 위에 스마트폰에서 자신 위치를 알리는 불이 반짝거렸다. 꺼졌다. 서둘러 스마트폰을 들어 메시지를 확인하지만 글은 뭉개져 잘 보이지 않았다. ‘안경 어디 있지?’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찾는데 보이지 않는다. “아들, 엄마 눈 어디 있지?” “아까 엄마 거실에서 책봤쟌아. 잠깐.” 아들이 거실에서 뒤적거리더니 서둘러 내게로 다가온다. 한 손에는 나의 돋보기안경을 들고서, “여기 있잖아.” 이죽거리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한다. 얄밉게 까분다. “까분다. 이리 줘.” “치~” “아들, 고마워.”

이제는 안경이 나의 필수아이템이다. 어쩌겠는가. 늙고 있는 세월을. 전철에서 만났던 중년 여성의 스마트폰 활자처럼 글씨 크기를 크게 하는 것은 왠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꿋꿋이 글자크기는 중간에 놓여있다. 무심한 세월 속에 시간은 흐르고 있다. 나도 흐르고 있다. 늙음과 노안을 지혜롭게 함께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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