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아이들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들여다본다. 가족과 놀러 갔던 사진도 있고, 집에서 기르는 반려동물의 사진이 올라오기도 한다. 얼마 전부터 아이들에게 공통적으로 올라온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크리스마스까지 남은 D-day 표시다. 아이들이 얼마나 간절히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지 느껴진다.
오늘은 성탄절과 관련된 주제로 글쓰기를 하기로 했다. 산타클로스의 정체에 대해서 간파한 지 오래된 5학년 아이들이다. 글쓰기를 통해, 자신에게 잘해 주어서가 아니라 사회에서 객관적인 선행을 한 사람이 누군지 찾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비록 상상이기는 하지만, 상대방이 좋아할 선물을 나누는 기쁨도 맛보게 하고 싶었다.
"얘들아, 오늘은 너희가 산타 클로스가 되는 거야. 너희는 산타 마을에서 선물을 딱 열 개를 고를 수 있어. 전 세계 어린이나 어른들 중에서 '상 받을 만한 일'을 했다고 생각되는 열 사람을 골라서 상을 주는 거야. 글에는 사람을 선정한 이유, 선물을 선택한 이유가 꼭 들어가야 해."
"와, 그럼 일단 나부터 하나 받아도 돼요?"
"생각해 봐라. 산타 할아버지가 자기 선물 먼저 챙기겠니?"
"하아, 그렇구나. 그건 안 되겠구나."
아이들의 다음번 꼼수는 아무에게나, 아무것이나 대충 쓰고 놀겠다는 데로 튄다.
"그럼 그냥 가족이나 친구들한테 주고 싶은 것 주고, 이유만 간단히 써도 되죠?"
"아니. 그렇게 개인한테 주는 건 세 개까지만! 나머지 일곱은 어떤 직업군이나 그룹한테 줄 수 있어. 예를 들면, 너희를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들한테 드리는 선물을 고른다거나, 도둑을 잡아주는 경찰관한테 드린다거나."
"아, 그러면 다 돈으로 드려도 돼요?"
요것들 봐라. 꼼수가 점점 더 정교해진다.
"그럼 다 현금으로 하려고? 꼭 돈이어야 하면 할 수 없지만. 어떤 선물이든지, 그 글 안에서 이유를 정확히 밝혀 써서 나를 설득시켜 봐."
아이들의 글쓰기가 10이라면, 손이 2, 머리가 3, 나머지는 입이 쓰는 것 같다. 아니, 손이 2, 머리가 2, 입이 5, 다리가 1. 공책을 펴고 나면 화장실에 더 자주 오가고, 사탕을 가지러 왔다갔다하는 발걸음이더 바빠진다. 머릿속으로 구상을 하는 건지 마는 건지, 친구들과 나누는 수다의 향연은 끝이 없다.
여자 아이들이 나누는 대화.
"야야, 너는 무슨 성탄 때 선물 받고 싶어?"
"그야 돈이지. 휴대폰 바꾸게."
"산타가 선물로 그냥 삼성을 주면 좋겠다."
"삼성? 그래, 이재용을 주면 좋겠다."
"너, 이재용 줘서 결혼하라고 하면 할 거야?"
"글쎄... 응, 할 거야."
깔깔깔, 까르르르.
너희들은 웃지만, 세상에. 가슴이 턱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아무리 농담이라고 해도, 아이들 세상에 드리워진 '돈 귀신'의 그림자가 사뭇 무섭다.
남자아이들이 나누는 대화.
"주식이나 비트코인 같은 거 주면 안 되나?"
"아니면 람보르기니."
"우리 아빠는 디스커버리."
"우리 아빠는 술 받으면 좋아할 걸?"
남자아이들 세상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돈이 무엇이기에, 명품카가 무엇이기에.
놀란 마음에 아이들에게 한마디 하려다가, 웃자고 하는 말에 죽자고 덤비는, 예능으로 하는 말에 다큐로 받는 상황이 될까 봐 입을 꾹 다물었다.
언제나 그렇듯, 무슨 주제가 주어지든지 막힘없이 써내려 가는 아이가 있고, 신중하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아이가 있다. 지나치게 신중한 아이 안에는 완벽하게 쓰고 싶다는 욕구가 숨어 있고, 빠르게 단번에 써 내려가는 아이에게는 깊이 구상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그러다 보니, 빠르게 써온 아이들에게는 다시 한번 생각해서 고쳐보도록 돌려보낼 때가 많고, 연필이 나가지 않는 아이들에게는 문장력이 떨어져도 일단 생각을 꺼내놓을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게 필요하다.
오늘도 그랬다. 열 개를 후딱 고르고 바로 채워서 낸 아이가 있는 반면, 시간을 충분히 더 주었는데도 일고여덟 개 이상을 끝내 채우지 못한 아이도 있다. 서로가 다를 뿐, 서로를 비교와 경쟁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게 하는 것은 문장력 향상 이상으로 배워야 하는 태도다. 그래서 나는 글쓰기 그룹을 형성할 때 아이들 사이의 관계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둔다. 글쓰기에 함께 하는 친구는 경쟁자가 아니라, 학우(學友)요 도반이어야 한다.
써온 글은 대부분 같이 읽어보고 간단하게라도 피드백을 해준다. 간혹, 아이들이 발표하지 말아 달라는 글이 있다. 지난주에는 '마음에 상처를 받은 일'에 대해 썼는데, 처음부터 미발표를 전제로 썼다. 부모님이나 친구들에게 보여줘서도 안 되며, 나조차도 되도록 빨리 읽고 넘기라는 주문을 받았다. 나도 그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산타 클로스가 된 아이들은 주로 엄마, 아빠나 친구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 했다. 엄마가 비싸다고 사지 못했다는 예쁜 옷을 선물로 주겠다는 마음도 있고, 마트 50% 할인권을 주고 싶다는 글도 있었다. 피곤한 엄마를 위해 안마의자를, 아빠와 방을 같이 쓰는 데 불만이 있는 엄마에게 방이 더 있는 아파트를 주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요리를 하기 싫어하는 엄마에게 밀키트를 선물하겠다고도 했다. 아빠에게 선물을 주겠다는 아이는 아홉 명 중에 네 명이 있었는데, 그중 두 명은 오래 탄 아빠의 자동차를 바꿔주고 싶어 했다. 그중에 읽다가 빵 터진 글이 있었으니.
나는 아빠에게 미국 로또 Megaball 100장을 주고 싶다. 아빠와 나는 내가 7살부터 로또를 취미로 샀고, 아빠와 나는 언제나 일확천금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이 날 때마다 로또에서 1조를 얻으면 뭐 할지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빠는 나를 위해 같이 살아왔고 맛있는 저녁을 많이 만들어 주었으니 그런 선물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아빠와 딸이 마주 앉아 로또를 긁고, 얻은 일확천금으로 무얼 할지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을 부녀의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글만 보자면 '뭐 이런 아빠가 다 있노? 애랑 같이 로또나 긁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아이가 쓴 글의 행간에서 아빠의 다정함이 읽혀, 더 이상의 비판적 해석은 하지 않기로 한다.
엄마와 아빠는 쿨하게 제치고 친구들만 선택한 아이도 있다. 시력이 나빠진 친구에게 안경을 주겠다는 아이도 있고, 반려동물을 키우는 친구에게 동물용 유모차를 주고 싶다고도 했다. 또 어떤 아이는 위의 글을 쓴 친구에게 어린이 복권 50장을 주겠다고 했는데, 이유는 그 친구가 복권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지난 해 생일 선물을 챙겨주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비트코인을 사고 싶어 하는 친구에게 '주식을 투자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을 선물하고 싶어 한 아이도 있다.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경찰관을 예로 들었더니, 아이들은 역시나 경찰관, 소방관, 환경미화원, 선생님 등이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썼다. "학교에서 들어오는 민원을 참으면서 일하는 것에는 커피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선생님에게 커피 무료권을 선물하겠다는 아이도 있었지만, 선생님에게는 앉아서 가르칠 수 있는 '지휘봉'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선생님들이여, 힘내시라.
글을 쓰는 중에 한 아이가 내게 귀엣말로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줘도 돼요?"라고 묻는다. 내가 "물론 되지. 왜 받을 만한지만 설명할 수 있다면."이라고 했더니 그 말을 듣고 나서는 대다수의 아이들이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라이프 스트로(정수 필터 빨대)'를 주겠다고 했다. 연우는 "아프리카 아이들이(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착한 일을 했을 거라고 생각"한단다.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위한 자선과, 착한 일을 한 보상으로 받는 선물을 구분하려고 고뇌한 흔적이 보인다.
공무원들에게는 '진상상대법을 대하는 책'을 주겠다고 하고, 밥 먹을 시간이 없는 자원봉사자들에게는 도시락을, 국가의 위상을 높인 국가대표 선수들에게는 가벼운 물통을, 요리사에게는 머리카락이 들어가지 않도록 머리끈을, 암 환자를 위해 기부하려고 머리카락을 기르는 이들에게 머리를 묶을 고무줄을 주겠다고도 했다.
자동차 수리공이 차량을 해부해서 연습할 수 있도록 차를 한 대 주겠다는 통큰 아이, 추운데 훈련하는 축구선수들에게 모자를 주겠다는 섬세한 아이, 환경미화원에게 핫팩을 주겠다는 따뜻한 아이, 추운데 배달하느라 고생하는 산타 클로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하겠다는 대견한 아이도 있었다.
아이들의 글을 다 읽고 난 뒤, 산타 클로스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선물을 글에서 하나씩 짚어 주었다. 환경미화원에게 핫팩 하나 사서 건넬 수 있고, 선생님에게 커피 한 잔 갖다 드릴 수 있다고. 사회복지단체에 작더라도 기부금을 신청할 수도 있고, 친구에게 필요해 보이는 물건을 줄 수도 있다고 했다.
산타가 아니더라도 산타의 선물은 누구나 줄 수 있는 거라고, 나름 근사하게 마무리를 짓는데... 어라, 아이들의 마음은 벌써 콩밭에 가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