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 씨, 도와줘서 고마워

비고에서 레돈델라로/ 나는 내 아이를 얼마나 아는가

by 글방구리

함께 묵는 콜롬비아 청년은 밤늦게 들어왔는지 우리가 새벽부터 부스럭대는 소리에도 꼼짝 않는다. 오전 8시가 체크아웃이라, 우리는 모든 준비를 마친 뒤 불을 하나씩 켜서 그를 찬찬히 깨워 주었다. 자전거로 가는 그를 이번 순례길에서 다시 만날 확률은 아마도 0%. 그에게 한국이 친절한 사람들로 기억되길 바라며 작별인사를 했다. 사고 없이 완주하기를, 축복을 한껏 담아 말한다. 부엔까미노.


2026년 1월 1일, 스페인 땅에서 내딛는 순례 첫날이다. 8시가 넘었는데도 밖은 아직 한밤중처럼 어둡고 고요하다. 2025년의 마지막 시간들이 지난밤의 잔치 쓰레기까지 가져가지는 않아서, 축제가 끝난 뒤의 거리는 난장판이었다. 요란한 기계음을 내며 지저분한 거리를 치우는 청소 노동자들도, 깨진 술병을 밟지 않으려 요리조리 피해 걷는 어수룩한 순례객인 우리만큼이나 이런 풍경이 마뜩잖으리라. 적절한 인사말이 떠오르지 않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외면하거나 목례로 그 자리를 피하듯이, 그들도 묵묵히 각자의 일을 하고 우리도 침묵 속에 길을 찾으며 어색한 여명의 시간을 건너간다.


내일모레면 딸내미 생일이다. 발달이 빠른 여자 아이라 초등학교도 한 해 빨리 들어가는 바람에 대학생이 되었어도 아직 미성년이었다. 자기 때문에 친구들까지 술집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걸 무진장 미안해하던 아이가 이틀 후면 드디어 성년이 되는 거다. 성년이 되길 고대하는 건 스페인 청년들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성년식을 치르느라 정장을 차려입은 청년들이 밤새 놀다 들어가는지 풀린 눈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잠에 취했는지, 술이나 혹은 약에 취했는지 흐느적거리는 모습이 안타깝고 안쓰럽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창창한 젊음도 취한 채 살다 보면 눈 깜빡할 새 가버린다는 건, 직접 살아봐야 비로소 깨닫는 것이니.


빗방울이 약할 때 우비를 꺼내 입었어야 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고 두어 시간 걸었더니 옷도, 가방도 축축해졌다. 땅이 젖어 잠시 앉아 쉴 수도 없다. 야트막한 산을 두 개 정도 넘었나 싶고, 장갑이 젖어 손도 시리다. 으슬으슬 춥기도 하고, 어깨는 빠질 듯이 아팠다. 가도 가도 끝이 없었고, 머릿속은 하얘졌다.


아이들 걱정이 됐다. 순례길을 계획할 때 처음부터 아이들의 동의를 얻은 게 아니었으므로.

"너희는 산티아고 걷는 거 어떻게 생각해?"

비행기 표를 끊기 전에 슬쩍 묻기는 했으나 아이들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빠가 계획하고, 아빠가 돈 내고, 맛있는 것 먹으며 좋은 구경 한다는데 마다할 것 있나?'라는 반응이었던 것 같다. 아직 젊은데 힘들어 봐야 얼마나 힘들겠어,라고 생각했으리라.

"저 군대에서 완전 군장하고 밤새 행군 했어요."

가장 큰 배낭을 자청해서 멨던 아들은 군 경험을 들먹거리며 자신만만해하더니 길들여지지 않은 새 등산화에 발목이 잡혔다. 등산화 끈을 조이는 다이얼이 복숭아뼈에 닿는다며 첫날부터 다리를 절룩거렸다. 걷는 동안 발가락에 가장 많은 물집이 잡힌 것도 아들 녀석이다.


딸내미는 의외로 씩씩했다. 조용히 걷고 싶은 내 마음과는 달리 옆에서 조잘조잘 댔다. 남자 친구 얘기와 학교 얘기, 꿈 얘기도 하고, 엄마아빠의 연애사를 묻기도 하고, 올해의 토정비결을 봐준다며 휴대폰을 계속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러다 오르막길에 다리가 아프고, 등짐이 허리를 짓눌러 신음소리가 절로 터져 나올 때면, 딸내미는 날개를 단 듯 혼자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너 안 힘들어? 왜 이렇게 잘 걸어?"

"엄마, 힘들 때는 아예 힘들다는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해. 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더 힘들어져."

힘이 덜 들 때는 옆에서 이야기라도 하고 가지만, 정말 힘이 들 땐 차라리 빨리 그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아이.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올 틈을 주지 말고 빠르게 움직이는 게 자기 나름대로 고통을 견디는 방식이란다.


교회에 반은 미쳤던 예전 남자친구 때문에 '교회'나 '성당'이라면 학을 떼는 아이. 산티아고를 가는 것도 '가족여행'이기 때문에 가는 거지, 그 외엔 어떤 의미도 없다는 아이. 어쩌다 미사 참례를 함께하게 되면 맨 끝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미사 시간 내내 휴대폰만 보는 아이. 우리 가족 중에 가장 종교적이지 않다고 여겼던 아이가 관상의 경지에 이른 수도자처럼, 부처를 죽이라는 득도한 승려처럼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고 있었다.


첫날 목적지였던 레돈델라에 도착했다. 오늘 걸은 거리는 27km. 새해 첫날이라 영업을 하는 곳이 없어, 유일하게 열려 있던 피자 가게에서 늦은 점심을 때웠다. 습기가 가득 찬 숙소에 짐을 푼 뒤엔 꼼짝하기도 싫었지만, 언제 다시 와보랴 싶어 시내 구경을 나왔다. 모두 지칠 대로 지쳐 있었지만 가방을 내려놓은 것만으로도 몸은 가벼웠다. 그렇게 힘들지만 기분 좋게 시내 구경을 하는 중에 갑자기 일어났다, 딸내미의 발작 아닌 발작이.


갑자기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듯, 딸내미는 도로 한가운데서 날카롭고 큰 소리를 내며 울음을 터뜨렸다. 얼굴은 창백했고, 온몸은 덜덜 떨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너무 놀라 왜 그러느냐고 물었지만 아이는 한동안 크게 울기만 했다. 너무 춥고 힘들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아무 말 없이 안아줬다. 그렇게 한 오 분 정도 지났을까, 아이는 울음이 잦아들며 평온을 되찾아갔다.

'얘가 너무 힘들었구나. 체력이 부족한 아이에게 우리가 너무 빡세게 했나 보다.'

아이는 자기 스스로에게 많이 놀란 것 같았다. 자기 상태를 조리 있게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갑자기 굉장히 불안해졌고, 자기가 자기가 아닌 것 같았으며, 가족을 공격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는 게 아이가 말한 요지였다.


20대 초반,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나는 그 당시, 저녁노을이 질 무렵이면 말할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눈앞이 하얘지기도 하고, 심장이 두근거려 그 자리에 주저앉기도 했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죽음의 공포가 몰아치기도 했다. 눈앞이 온통 보랏빛으로 보이기도 했다. 자기 전에 그런 불안감이 닥쳐오면, 난 베개를 들고 엄마 방으로 갔다.

"엄마, 나 요새 자주 이렇게 불안해. 꼭 금방 죽을 것 같고. 왜 그러는 거지?"

그때 엄마는 이렇게 대답했다.

"죄를 지어서 그래."

죄 때문이라고. 내가 죄를 지어 그런 거라고.

엄마는 왜 나한테 그렇게 말했을까. 죄를 지으면 불안해지는 건 맞지만, 그게 정답은 아니었음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알았다. 난 그때 미주신경실조증을 앓았고(지금도 있지만), 공황장애와 불안장애의 징후가 있었던 거지, 죄를 지은 대가로 벌을 받아 그런 게 아니었다.


아이가 그때의 나처럼 불안해하고 있었다. 나는 엄마와 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뭘 어떻게 해주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아이가 나처럼 약한 엄마가 아닌, 더 큰 힘을 가진 존재에게 의탁하면 마음이 편안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끼고 있던 묵주를 아이 손목에 끼워주며 말했다.

"너 오늘 너무 힘들었나 봐. 몸이 힘들면 그럴 수 있어. 얼른 들어가서 쉬자. 푹 쉬고 나면 마음도 나아질 거야. 그래도 불안해지면 성모님한테 도움을 청해 봐."

나로서는 최선이자 알고 있던 유일한 방법을 알려 준 거였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아이에게는 적당치 않은 처방이었다.


숙소로 돌아온 아이는 매운 걸 먹으면 좀 낫겠다면서, 아껴두었던 짜파게티를 끓였고 한국에서 가져온 불닭 소스를 넣어 먹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나도 정리를 마친 뒤 아이 옆에 누웠다. 아이는 평온해진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엄마, 나 아까 왜 그랬는지 알아냈어."

"그래? 어떻게? 왜 그랬던 것 같아?"

"챗지피티한테 물어봤는데 답을 말해준 것 같아. 과학적으로 정리해 주니까 이해가 돼."

아이는 방에 들어간 뒤 자신의 증상에 대해 챗지피티에게 물었고, 인공지능은 아이가 원하는 상담을 소상하고도 친절하게, 과학적으로 해주었던 거다. 성모님한테 기도하라는 내 처방보다도 불안과 해리성 장애의 징후를 보인 원인과 과정, 대처 방법까지 소상히 알려준 지피티에게 아이는 더 안정감을 느낀 거고. 인공지능도 틀릴 수 있다, 몸이 너무 힘들면 뇌에 잠시 과부하가 걸릴 수 있다, 그런 상황이 또 올 수도 있지만 이제 대처 방법을 알았으니 너도 당황하지 않을 거다,라고 정리가 되자 아이는 안정을 찾았다. 이후 여러 날 동안 더 힘들게 걸었지만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딸내미만큼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고 믿어왔다. 누구 못지않게 사랑한다고도 자신해 왔다. 아이와 가장 친한 친구라고, 아이를 달달 볶는 여느 엄마와는 다르다고 자부해 왔다. 그러나 그날 이후 나는 그게 얼마나 큰 교만이며 오해였는지 알게 됐다. 사람이 사람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특히 자기 자식이니까 내가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 그것만큼 바보 같은 믿음은 없다. 세상 누구에게나 친절한 '챗 씨'만큼도 아이의 마음을 어루만질 줄 모르면서 내 신념대로 살아 주길 바라다니. 아이가 성년이 되는 그즈음에야 비로소, 나는 아이를 나와 다른 인격체로 인정하는 엄마의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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