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에 따라 그날그날 필요한 물건이 다를 테다. 여고시절, 학교에 가면서 교과서를 빼놓고 가면 엄마는 "군인이 전쟁 나가면서 총 두고 가냐?"라고 타박을 하시곤 했다. 군인에게 총이 있어야 하듯, 학창시절에는 교과서나 학용품 등이 필요한 물품이겠다.
늦은 나이에 어린이집 교사를 시작하면서, '왜 어린이집 교사들은 저렇게 짧은 앞치마를 입는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었다. 나는 꽃집 주인들처럼, 혹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처럼 기왕에 입을 거면 길이가 길고 폼이 나는 린넨 앞치마를 입고 싶었다. 그런데 살다 보니, 길이가 짧고 주머니가 있는, 일명 '보육교사 앞치마'가 짱이더라. 밥풀을 떼고 콧물을 닦아주기 위한 손수건과 휴지, 아이들의 모습을 기록할 수첩과 볼펜이 들어갈 만한 주머니가 있어야 하는, 그러나 길이는 무조건 짧아야 활동에 불편이 덜하다는 걸 알게 됐다. '경험'해 봐야 아는 것들이다.
예전에는 그 용도를 잘 알지 못했으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는 데 꼭 필요한 물건'이 되어 버린 게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요일별로 담아놓는 약통이다. 평소 건강관리를 잘 한 사람은 그렇지 않겠으나 나는 '케세라세라'에 가까운지라, 성인병이라 칭해지는 질환들이 하나씩 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잠깐 아픈 건 이삼일 약 챙겨먹으면 낫지만 이놈의 '기저질환'은 죽을 때까지 날마다 약을 챙겨먹어야 한다니,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날마다 습관적으로 먹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이걸 아까 먹었는지 아직 아니 먹었는지? 어제 먹었는지 오늘 먹었는지? 내 입에 들어간 건데도 도무지 헷갈리는 것이다. 그럴 때 발견한 '요일별 약통'이라니! 세상, 이렇게 좋은 물건이 없다! 이걸 발명한 사람에게 복 있을진저! 이제는 복용해야 할 약을 두 번 먹을 일도, 건너뛸 일도 없다. 단,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만 헷갈리지 않는다면.
"나 병원 좀 다녀올게."
"왜요, 어디 아프세요?"
"응, 감기 몸살인가 봐."
일을 하면서 젊을 때와는 달리 나이가 들수록 아프다는 말을 더 자주 하게 됐다. 어느 날은 감기 몸살, 어느 날은 무릎이 시큰, 어느 날은 손목이 삐긋, 어느 날은 소화불량, 어느 날은 이가 아프고, 어느 날은 방광염, 그리고 어느 날은 "응, 먹던 약 탈 때가 되어서."
이렇게 병원에 가야 하는 외출이 잦아지다 보니, 아프다는 말을 하기가 싫어졌다. 왜 맨날 아프냐,고 눈치를 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병원에 자주 간다고 뭐라 하지도 않지만, 나 스스로 자꾸 아프다는 말을 하게 되는 처지가 싫어진 것이다. 그래서 퇴직을 했다. 퇴직을 하면서 아픈 데도 같이 멈추면 좋은데, 퇴직을 했다고 아픔도 같이 멈춰지지는 않더라.
나이가 든다는 것은, 몸의 여기저기가 아프고, 먹어야 할 약의 갯수가 늘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늙으면 주름이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다. 쓰면 쓸수록 기능이 약해져야 순리다. 나이는 드는데 점점 더 젊어진다는 것은 순리를 거스르는 것,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다. 약해지지 않겠다고, 아프지 않겠다고, 잃지 않겠다고 아등바등하는 것을 '노욕'이라 한다. 아이들 욕심은 귀여울 때도 있지만, 노욕은 추하기만 하다.
기계나 사람이나 기능이 하나씩 둘씩 약해지다가 멈추는 것, 쓰면 쓸수록 좋아지는 기능은 부자연스럽다. 노년은 상실에 익숙해져야 하는 삶이다. 아직 잃지 않은 기능을 일부러 없애버릴 필요도 없고, 고쳐 쓸 수 있는 기능은 고쳐서 오래 쓰는 것이 현명하겠다. 그러나 많이 사용해서 닳았다고 슬퍼하거나 화를 낼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새로운 아픔이 여태까지 가지고 있던 아픔을 조금 덜어주겠구나, 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더 좋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