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사료처럼 밥을 먹었나.
오늘은 무엇을 먹었으냐고 아내가 물었다. 아내의 표정을 보니 숙제 검사받는 아들이 된 기분이라, 사 먹는 게 빤하지, 하고 뭉뚱그려 답했다. 오늘도 점심에는 제육덮밥과 돈까스 세트를 배달시켜서 먹었고, 저녁에는 돼지국밥을 한 그릇 사 먹고 들어왔다. 점심만이라도 샐러드나 포케를 사 먹지, 하는 걱정 어린 아내의 말을 들으며 늦은 밤 하루를 마감했다.
오늘은 뭐 먹지. 이 질문만큼 철학적인 질문이 또 있을까?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고민이 깊어지다 보면, 왜 인간은 하루에도 몇 번씩 식사를 해야 하는가, 왜 인간은 메뉴 선택의 자유를 감당하기 힘들어하는가, 하는 근원적인 물음에 도달하게 된다. 이렇게 말하면 먹는 게 귀찮은 '소식가' 같지만, 사실 고기는 1인 1근부터라고 생각하는 '대식가'에 가깝다. (먹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면서) 매일 먹는 끼니는 왜 그리도 고민을 안 하느냐는 아내의 물음은 송곳같이 날카롭다.
어쩌다 나는 돈까스, 제육, 국밥을 인간 사료처럼 먹게 되었을까.
혼자 일하는 날이 많다. 그리고 돈까스, 제육, 국밥을 다루는 식당은 대부분 혼밥 난이도 최하에 해당하는 편안한 분위기를 제공한다. 국밥집에 들어가 착석하면,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야 너도? 하고 눈인사를 건네는 것만 같은 동지애를 느낀다.
여럿이서 오더라도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다. 음식은 항상 빠르게 나오고, 술을 시키지 않는 이상 남자들은 대부분 효율적으로 식사에 집중한다. 목표 지향적 본능을 가진 남자들은 그렇게 배를 채우자는 미션을 향해 질주한다. 이곳에선 혼자나 여럿이나 내 밥만 잘 먹으면 된다.
건강을 생각해서 점심으로 샐러드나 포케, 혹은 쌀국수를 자주 먹은 시기도 있다. 그때마다 이르게 찾아오는 허기의 당혹감은 풀리지 않는 문제였다. 그러니 초록색 풀이 주재료인 메뉴는 체구가 제법 되는 남자들에게 식사가 되기는 어렵다.
가격 또한 중요한 부분이다. 한 끼 1만 원은 매일 사 먹는 이들에게 심리적 저항선인 경우가 많지 않은가. 돈까스, 제육, 국밥 가게를 잘 찾아보면 이 심리적 저항선에서 멀지 않은 가격으로 샐러드와 비교할 수 없는 든든함을 주는 곳이 많다. 뱃골이 큰 남자들이 가성비를 생각한다면, 이만한 메뉴를 찾기 어렵다.
그리고 무엇보다 맛이 자극적이다. 간이 세고, 튀기고, 양념 범벅이니, 웬만해서 맛없기가 쉽지 않다. 늘 평균은 한다는 것은 선택의 순간이 주는 고민을 덜어준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돈까스, 제육, 국밥을 먹었다.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이 말은 프랑스 법관이자 미식가인 장 앙텔름 브리야사바랭(Jean Anthelme Brillat-Savarin)이 1825년에 쓴 책 <미식예찬>에 담긴 문장이다. 현대에는 당신이 먹은 것이 곧 당신이다,라는 말로 변형되어 알려지기도 했다.
이 명언에는 약간의 오해가 있는데, 사실 정확한 의미는 사회 계급에 따라서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는 음식의 취향이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주면, 당신의 사회적 계급을 맞춰 보겠다는 다소 도발적인 뜻인데, 후대인들은 그냥 건강하게 먹자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200년 후 한국에서도 회자되는 말이 되었으니, 어느 쪽의 의미이든 다 음미해 볼 만하다.
그렇다면 정말 돈까스, 제육, 국밥이 곧 나일까?
빨리 나오고, 빨리 먹을 수 있고, 웬만해서 맛없지도 않고, 배를 채우는 데 가성비도 좋고, 혼자 먹기에 부담도 없는 메뉴. 200년 전 프랑스의 한 미식가의 말처럼, 이런 이유가 필요할 수밖에 없는 나의 사회적 사정을 반영한 메뉴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의 콜레스테롤과 체지방 수치를 보면 현대의 해석도 타당하다.
아내는 나의 식사, 아니 우리의 식사를 이대로 방치해선 안 된다며 걱정했다. 건강뿐만 아니라 낮은 삶의 질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이 모두 염려된다면서.
그렇다면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