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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빛승연 Mar 27. 2022

출간 일기 5. 계약: 미치지 않고서야

샘플원고만으로 계약이 됩니다  

어렸을 때부터 여동생과 이불을 덮고 침대에 누워 상상의 이야기를 펼치는 게 큰 재미였다. 그 습관 고대로 간직해서 어른이 된 후에도 틈만 나면 혼자 공상의 세계로 빠지기가 일쑤인 나는 투고 메일을 보내면서도 혼자 소설을 얼마나 썼나 모르겠다. 


티브이에 등장하는 근사한 출판사 대표님이 연락하셔서 당장 계약하자는 상상, 굵직한 경력을 가진 출판사 편집장님과 식사를 하면서 책의 미래에 대해 대화하는 상상...... 

쥐뿔도 뭣도 없으면서, 심지어 제대로 된 초고도 준비되지 않았으면서 이런 상상을 하는 건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나는 살짝 미쳤던 것 같다. 


난 특별한 사람이야,

내 원고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거야,

이 책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획기적인 내용이야,

난 글 쓰는 재능을 타고났어,

......


지금 누가 이런 말을 한다면 '그게 중요한 게 아니거든요.'라고 딱 잘라 말해줄 텐데. 그때 난 혼자 뜬구름을 타고 두둥실 혼자만의 세계를 만끽하고 있었다. 





출처: pixavay



둘째 날 십여 군데 투고 메일을 보내고 난 뒤, 다음날부터 출판사로부터 메일이 하나 둘 오기 시작했다. 


우와! 벌써 메일이 오다니.... 두근두근 하는 마음으로 수신함의 메일을 클릭했다. 아니 벌써 계약하자는 얘기면 어쩌지?라고 생각하며 열어 본 메일의 내용은 대부분 이러했다.


안녕하세요. 저희 출판사에 귀한 원고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원고는 면밀히 검토한 뒤, 추후 결과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메일은 잘 받았고, 검토해보고 연락해주겠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때부터 살짝 내 시나리오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뭐지, 별로라는 얘긴가.......'


안녕하세요. 투고 원고의 경우 홈페이지를 통해 일괄로 접수를 받고 있습니다. 홈페이지를 통해 등록해주시면 해당 내용을 원고와 함께 해당 편집 부서에 전달하여 검토 기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큰 출판사의 경우는 홈페이지로 투고를 해달라는 곳도 있었다. 그런데 홈페이지를 가보면 원고 전문을 올려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원고가 빈약한 나는 차마 투고를 할 수가 없었다. 


우선 소중한 원고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보내주신 원고를 내부에서 상세히 검토했습니다만, 저희 출판사와는 맞지 않아 출간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렇게 답장을 주는 출판사는 그래도 감사한 경우다. 추신으로 응원의 메시지까지 써주신 곳도 있었고, 코로나로 출간이 신중해진다고 부연 설명을 해주신 곳도 있었다. 투고한 곳 중 절반 이상은 답장조차 없었고, 수신확인이 안 돼있는 곳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원고와 약간의 연결 고리만 있으면 출판사 성격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메일을 보낸 나의 잘못도 한몫했을 테지. 인문학 출판사에 육아서 내용을 디밀었으니 먹힐 리가 없지. 


그래도 메일로 바로 계약서까지 첨부해서 계약하자는 곳도 있어서 쓰러질 뻔하다가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원래도 좋아하는 출판사여서 최종까지도 한참을 고민했던 곳이었는데 최종에서 제외하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장점이 많은 출판사였다. 


보낸 메일에 비해 회신율은 적었지만 희망은 있었다. 투고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던 것. 만나서 긍정적으로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곳, 샘플 원고만으로는 판단이 어려우니 원고를 조금 더 보내달라는 곳이 반반이었다. 


그중에 내가 진짜 계약하고 싶었던 출판사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보내준 원고 몇 개를 보고는 거절 의사를 보내왔다. 조금 더 실용적인 원고가 필요하다는 피드백이었다.  조금 슬펐지만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는 편집자님의 말씀에 감사했고 귀한 경험이었다.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다는 곳, 계약을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는 곳 중에서 가장 적극적인 세 군데 출판사와 미팅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도 초보 자니까 그 '기준'이 가장 '적극적'인 곳이었던 것 같다. 합리적으로 판단했다면 내 책을 잘 만들고 잘 팔아줄 곳을 고려하는 게 정답일 텐데 그때는 내 '마음'이 모든 결정의 기준이었다. 



아이 맡길 곳도 마땅치 않아서 돌도 안된 둘째를 힙시트에 메고 미팅 자리에 나갔다. 그나마 이때만 해도 안고 있으면 아이가 제법 잘 자주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미팅 나가기 전에는 묻고 싶은 말도, 따져볼 조건도 많았었는데 막상 아이와 카페에 가니 아이가 얌전히 있을 동안 빨리 미팅을 마쳐야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것 중 반도 못 물어보고 일어서야 했다. 하지만 한 때 출판사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던 터라 출판사 편집자님이나 대표님을 만나는 일은 솔직히 떨리기보다는 너무 즐거웠다. 


가장 처음 연락 준 출판사 대표님은 '쓰고 싶은 대로 그냥 지금처럼 쓰시면 됩니다.'라고 말씀해주셔서 가장 감사했고 마음이 편안했다. 두 번째 만났던 출판사 편집자님은 내 원고를 요목조목 살펴보시고 가장 적극적으로 피드백을 해주셔서 믿음이 갔다. 


복직 전에 빨리 계약을 하고 책을 써야 한다는 생각에 빨리 결정을 내렸고 순식간에 계약이 결정되었다. 감사한 마음이 컸기에 나중에 다른 출판사들에서 연락이 오기도 했지만 그다지 아쉽지 않았다. 



출간 기회서와 두장짜리 샘플 원고 하나. 이걸로 계약이 가능하냐고? 가능하다. 대형 출판사에 대한 욕심만 내려놓는다면.


내가 가장 잘 썼다고 생각되는 원고 하나. 그리고 미친 척 뻔뻔하게 쓴 출간 기획서 한 장. 이거면 충분한 답이 된다. 나중에 들었지만 출판사에서 먼저 출간 제의를 하는 게 아닌 이상, 어차피 계약 후 출판사와 함께 책의 방향을 정하고 내용을 보완해야 하기 때문에 출간이 급한 출판사가 아니라면 오히려 원고가 적은 걸 편하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출간 계약을 했고, 출간 예정인 책을 쓰는 예비 작가가 될 수 있었다. 써온 글도 없었고, sns에 팬이 1도 없던 보통 사람인 내가 그럴 수 있었던 건 마음 가는 대로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너무 재지 않고 따지지 않고 '그냥 한번 해볼까, 아니면 말고.' 이런 마음이었기 때문에. '애를 안고 그 중요한 미팅 자리에 나가다니 미친 거 아니야?'라고 생각했다면 못했을 법한 일들을 그저 '뭐 어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책이야 지금도 출판 시장에 수두룩 빽빽이라는 생각 따위 할 겨를도 없이 '나름 괜찮지 않아'라고 뻔뻔하게 들이밀었기 때문에. 


상상만으로 되는 건 없다. 하지만 가끔은 미친 척 한번 해보는 게 통하는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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