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 때리는 시간들 속에서
캠핑 가서 가장 귀찮은 일 중의 하나는 한밤중에 화장실에 가야 하는 거다.
일어나 신발을 신고 겉옷을 챙겨 입어야 하며 지퍼로 된 텐트 문을 열고 나가 한참을 걸어야 하니 정말 귀찮은 일이다. 하지만 그 귀찮은 일이 참 신기한 경험이 된 적이 몇 번 있다.
가로등마저 다 꺼진 캠핑장이 묘한 환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분명 조명은 없는데 이 밝음은 뭐지?
달빛이었다. 가끔 밤하늘이 낮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두둥실 떠다니는 흰구름이 보일 정도로 하늘도 환하고 지상도 환한. 대기까지 청명하면 그 환함은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비몽사몽 상태로 얼른 다녀와야지 하며 땅만 보고 종종거리며 걷던 나는 그 은은한 달밤의 아름다움에 넋을 놓아버렸다. 달빛이 이렇게 환할 수 있구나! 감탄하면서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 떠올랐다. 나귀를 타고 한밤중에 산을 넘던 허생원 일행이 가는 길을 비춰준 둥그런 달빛!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던 그 장면.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어드는 모습이 연상되는 바로 그 장면이었다. 분명 밤이지만 모든 것이 제 모습을 또렷이 드러내는 한밤중의 신비로운 풍경. 화장실에 다녀와서도 그 하늘을 바라보며 한참을 멍하니 즐겨보았다. 멋진 장면을 보면 습관적으로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이대지만 카메라는 내 눈이 느끼는 것만큼 담아내지 못한다.
또 한 번은 바닷가에서였다. 그때도 가로등이 다 꺼진 늦은 밤이었다. 잘 준비를 하려고 정리를 하고 있는데 내 시야 밖에서 살짝 스쳐간 바닷가의 모습이 나를 붙잡는 느낌이 들었다. '어? 뭐지?'하고 뒤를 돌아보니 깜깜했던 바다는 수줍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공조명이 만들 수 없는 조도 낮은 흐뭇한 달빛이 푸른 바다 위를, 하얀 백사장을 부드럽고 촉촉하게 감싸고 있었다.
"와! 어쩜 달빛이!!!"
가로등이 들어와 있을 때는 절대 보이지 않던 장면들이 가로등이 꺼지자 기다렸다는 듯 드러나는 모습이란...
그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감사해서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달빛 하면 생각나는 또 다른 추억은, 불멍을 하다 남은 불씨를 마저 태우고 있을 때였다. 화롯불의 강렬함에 밀려 미쳐 보지 못했던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보름달이라기엔 모양이 살짝 뭉그러진 달이 자기가 품고 있는 빛을 은은하게 뿜어대고 있는데 지나가던 구름이 자꾸만 방해하는 모습이었다.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 시구가 생각나는 풍경...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난 이 시구를 읽을 때마다 왜 '구름에 달 가듯이' 일까? '달에 구름이 흘러가듯이' 이게 맞지, 하며 시적인 느낌을 팩트로 고치려 든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달멍을 하고 있다. 힐끔힐끔 보이는 달이 답답하여 온전한 모양으로 드러나길 간절히 기다리기도 하다가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저러다가 드러나기도 하고 완전히 가려지기도 하는 게 자연의 이치지. 삶의 이치이기도하고. 갑자기 인생의 진리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환하고 둥근 보름달 같은 시기가 있기도 하고 어렴풋이 가려진 불안정한 시기도 있었다. 그러다 완전히 가려진 시기도 있었지만 그 시기는 영원하지 않았다. 곧 지나갔다. 뭐 이런 진리를 나도 모르게 떠올려본다.
휴대폰만 보지 않을 수 있는 캠핑의 밤. 이런 시간이 참 좋다. 나를 깊이 있게 돌아볼 수 있는 시간. 노을 멍, 달멍, 그리고 불멍까지, 자연과 함께 하며 복잡한 머리를 비우는 멍 시간은 참 소중하다. 화장실 가는 길에도 선물 같은 풍경이 펼쳐지고 잠깐잠깐의 멍 속에 깨알 같은 깨달음이 피어올라 내 머릿속을 정화해 준다. 그 깨달음이 오래가진 않지만 자주자주 나를 환기시켜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망각의 동물이니 잊고 또 깨닫고를 반복하며 사는 수밖에.
자연은 나를 조용히 가르치고 위로해 준다.
하지만 그 위로와 가르침은 자연에 온전히 마주해야만 들을 수 있다.
바쁜 일상에서 빠져나온 자만이 자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힐링에도 집중이 필요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