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3년7년3년 _ 3화 by. 글지마
제 순수한 의도를 그녀가 받아들일지 의문이다. 우리는 수평적인 관계인데 후원자란 단어가 거슬릴까. 내가 돈이 많고 창작물로 대중의 인기를 먼저 끌었다고 해서 너보다 높지 않은 것을.
하나 어찌 보면 내가 주장하는 이 수평적인 관계란 강자만의 착각일지 모른다. 을을 자처하는 그녀의 말마따나 ‘을에게 애매한 우울을 불러일으키는 서열 싸움’이 맞는 정의 일지 모른다. 어쩌다 자신이 갑이 되었는지 K는 가늠할 수 없다. 아마 1년 전이었을까. 그녀를 만난 지 두 달이 넘어가던 시기였다. 우리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란 사실에 안타까울 만큼 내 열정은 온통 너를 향했다. 넘치는 마음을 몰라주는 너에게 서운해서 화를 냈다. 많은 것을 가졌다 생각했는데 네가 원하는 것 중에 무엇 하나 내가 가진 게 없어서 조급하고 답답해서 심장이 불구덩이에 떨어진 듯 팔딱거렸다.
“우리 공개 연애할래. 아니면 동거 하자, 결혼도 좋고.”
얼굴 한 번 더 보겠다는 단순한 욕망에 꺼낸 말에 그녀 표정이 굳어졌다. K는 순간 아차 싶었지만 그런 철부지 앤 하는 말 말라는 그녀의 말에는 K도 화가 났다.
“네 생각보다 진중하게 꺼낸 말이야. 그래. 내가 너무 갔어, 인정해. 그래도 내가 있는 돈 그저 같이 쓰자는데 우리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
어깨를 잘게 들썩이며 숨을 고르던 그녀가 혀끝으로 입술을 훔쳤다. 이불보 헝클어진 호텔 방을 바라보며 그녀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내가 유명한 아티스트여도 너가 그랬겠니?”
마주친 시선에 K는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땅바닥에 벗어둔 신발을 신고 테이블에 엎어진 화장품을 주어 담으면서도 말을 이었다. ‘내가 너만큼 유명하고 잘 나가는 아티스트였어도 똑같이 말했겠어?’ 그녀는 마지막으로 핸드백을 움켜쥐었다.
“K야. 우리 사귄 지 겨우 두 달이야. 벌써 이러지 말자.”
말을 도구로 쓰려 들면 안 됐다. 합리적 이성은 이미 그녀 앞에 무릎 꿇은 지 오래였는데 K가 어찌 이길 수 있을까. 질 걸 알면서도 달려드는 패잔병의 신세가 가련하지만 승리의 여신에 눈이 먼 지금의 상태도 나쁘지 않다고 K는 생각했다. 사실 화내는 모습마저 예뻤다고 그가 후에 고백하자 그녀가 K의 코를 살짝 비틀며 품에 기댔다. “그럴 땐 그런 말 하지 마. 여자들이 싫어해.”
여자 모두가 싫어한다는 말엔 살짝 의문이 들었지만 침묵을 일찍 배운 K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딱 이만큼이라면 좋았다. 너를 사랑해서 지켜야 할 규칙이 생겼다는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가끔 몸보다 큰 마음이 번쩍 튀어나와도 그만큼 그녀를 사랑해서라고 생각했다.
“지금이야 행복하지. 시간이 흐르면 뭘 위해 그 고생을 했나 싶더라. 네가 아직 젊어서 그래. 인생에 열정이 아직 들끓는 청춘이잖아. 한 번 정상을 찍잖아? 인생 별 거 없다. 나 잘 챙겨주는 사람 찾게 돼. 그리고 그냥 결혼하면서 일생 보내는 게지. 인생이 별 거겠냐.”
인생 선배가 충고해주겠다며 술자리에서 새파랗게 어린 후배를 붙들고 한다는 말이 순간 머릿속을 스쳤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버튼을 눌러 휴대폰 화면을 켰다. 여기는 밤 거기는 아침. 뉴욕과 한국 사이에 벌어진 13시간의 차이. 차라리 나라와 나라로 떨어져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하다면 내가 나쁜 놈인가. 강남에서 일산까지는 장애물이 너무 많다. 복잡다단하게 뒤엉킨 고뇌와 추측이 실타래를 만들어 머릿속을 뒤덮었다. 부정적인 결만이 꼬리를 쏙 뺀 채 K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따위 가위로 자르면 그만인 것을, 아직은 내키지 않았다. 우리를 연결한 이런 미묘한 요소를 설명해봤자 J에겐 그저 현재를 불편하게 만드는 불순물 따위에 불과하단 것을 잘 알기에 K는 그저 묵묵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저기서 튀어나온 생각들이 연쇄 추돌을 일으켜 혼잡한 머릿속을 숨기는 대외적 가면은 가장 잘 작동하는 장치 중 하나였다.
“그냥 싸나이답게 방향을 정하란 말야. 딱 사 주겠다, 말하고 끝내든가. 아니면 그냥 안 사련다, 네 스스로 마음먹고 끝내. 몇 주 째 난리야. 사내 새끼가 마음을 못 먹어요, 어휴.”
사나이답게 클럽 VIP 테이블 예약을 마친 J가 얄밉게 검지를 파곤 좌우로 흔들었다.
“넌 그래서 안 돼, 인마. 책 좀 그만 읽어라. 그러니까 네가 생각이 깊은 거야.”
K가 놀란 표정으로 감탄을 터뜨렸다. “너무 참신한 주장이라 할 말이 없는데.” K가 감탄하며 손에서 잡지를 내려놓자 J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피며 군인처럼 경례를 해 보였다. 그가 후련하게 발을 테이블에서 내려놓자 고급스러운 돌멩이가 서슬 푸르게 울었다. 흘러내린 옆머리를 짧게 쓸어 넘기며 다시 시선을 휴대폰으로 돌린 K가 J의 뒤통수에 대고 투박하게 내뱉었다.
“대리석 좀 그만 괴롭혀. 불쌍한 석재한테.”
“석재? 사람 이름이냐.”
“대리석 말야. 불쌍하지도 않냐, 내구성이 강하지도 않은 그저 그런 돌일 뿐인데, 깎으면 예쁘다는 이유로 가공돼서 이 호텔에 있는 게.”
시간을 절약하고자 성급하게 셔츠 단추를 푸고 있던 J가 천천히 뒤돌아봤다. 그의 광대가 한껏 짜증을 머금고 올라가 있었다.
“미친놈.”
J는 가수로 하는데 일말의 가치도 없는 지식을 제 친구에게 선사한 수백 권의 책을 욕하며 뒤도 안 돌아보고 복층 계단을 올랐다. 딱히 별다른 답변을 기대하지 않은 K도 다시 시선을 내렸다.
‘강남 근처에 집 하나 구해볼까?’
보내지 못한 메시지가 화면에 선명했다. 그때 J가 멀리서 우렁차게 소리 질렀다.
“야, 뭐가 문제야! 돌 깎아다 아이고 예쁘다 해주겠다는데. 단순하게 좀 살자 우리!”
흠칫하며 K가 고개를 들었다. 이런. 알고 보니 가위는 J가 가지고 있던 모양이다.
휴대폰에는 거친 돌산 하나가 쓰여 있었다. 예쁘게 깎아주면 될까. 집이란 단어는 냉혹하니 작업실 좋겠다. 아니. 거부반응을 일으킨 전적이 있는 단어보단 다른 게 나을 듯했다. 강남은 이기적이니 이대가 무난하다.
사실 전송 버튼을 누를 생각은 없었다. 말로 꺼내지 못하는 말 기계에 써보기라도 했는데, 잘 다듬어진 선물이 한국으로 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