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의 의미에 대해
‘주변에 속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이 몇 없네, 어쩌면 내 모든 걸 말할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곤 손끝으로 핸드폰 화면을 밀어 올립니다.
‘얘는 해외여행 갔네.’
‘얘는 벌써 결혼하네.’
‘얘가 걔랑 친했었나?’
자꾸만 마음 둘 곳 없는 관계에 눈을 돌립니다.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잘 사는 것 같아, 저 역시 ‘나름 바쁘게 잘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진을 올립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제 손에 쥐어진 작은 세상 속, 저라는 사람은 조금은 과장되게 주변인들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잘 살아가고 있고, 많은 것들을 배우는 중이며, 그로인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있는 중이라고.
그렇게 저라는 사람은 제가 아닌, 제가 올린 사진과 글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전보다 수많은 사람들이 제 연락처에 살고 있고 그들의 소식을 훨씬 빠르게 접하고 있지만, 불편이 사람들의 소식을 듣던 때보다, 어찌 사람들의 마음 들은 지가 오래인 것 같습니다.
바쁘게만 사는 게 아쉬워 연락할 인연을 찾으려 핸드폰을 들여다보다, 잘 사는 지인들의 삶에 방해가 되진 않을까하는 괜한 걱정으로 다른 화면을 띄웁니다.
민망함을 감추려 의미 없는 소식들만 밀어 올리다, 마음속 자리 잡은 소외의 짐을 외면할 수 없어 프로필 사진을 가장 즐거워 보이는 모습으로 다시 바꿨습니다.
사람들이 올린 글을 읽다보면, 나만 외로운 게 아닌 것 같아 왠지 모를 위안이 들다가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위로받고 힘을 내는 제 자신이 딱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 괜히 멈칫하게 됩니다.
분명 달라진 것은 예전보다 겉 보이는 웃음이 늘었다는 것과 사람 대하는 것이 어렵지 않아 어색한 만남을 잘 이어 간다는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과의 식사자리에서 너스레를 떨기도 하고, 참 좋은 사람인 것 같다는 호감 표시를 하며 관계에 큰 고민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 현재입니다.
그러나 만남 뒤 비어있는 공백엔 의도치 않은 공허감이 짙습니다.
분명, 좋은 말들이 옮겨가고 웃음꽃이 피었던 자리였지만 발걸음을 옮겨 집으로 향하는 장면엔 무표정인 얼굴로 핸드폰 화면만 밀어 올리는 낯익은 이방인이 담겨있습니다.
허무하고 쓸쓸한 바람에 속눈썹을 뺏기기 싫어 ‘꽉’하고 눈을 다물어 보지만, 휜 마음은 나아질 기미가 없습니다.
잦아진 바람에 실눈을 떠 바라본 사람들의 모습은 작은 기계에 눈을 올려놓고 짓는 슬픈 무표정입니다.
누군가 외롭다는 말 한마디 건넨다면 당장 귀 기울여 그의 슬픔을 듣다 함께 울어주고 싶은데, 어느새 작아진 마음의 소리는 한걸음, 한걸음 뒷걸음치기 바쁜 모양샙니다.
연락처에 들어가 맨 위에 있는 번호를 눌러 ‘지우기’에 엄지를 놓습니다.
망설이던 손가락은 결단의 힘을 빌려 핸드폰 화면을 터치하고, 이내 핸드폰이 말을 겁니다.
“지우시겠습니까?”
눈과 손가락은 공중에 머물러, 끊어 달라 조르는 말없는 연락처와 시선을 맞춥니다.
소음이 차단된 공허의 공백엔 두 눈을 끔뻑이는 나와 환히 얼굴을 드러내는 화면만 움직입니다.
감정은 그 장면을 확대하고, ‘진정한 관계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머릿속 중앙에 물음표를 찍습니다.
마주한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어 방황을 하다, 타인의 답은 어떤 것들인지 궁금해 주위를 두리번거립니다.
정류장 유리에 비친 굳어있는 얼굴들을 보며, ‘저들도 나와 같겠다.’라는 이상한 확신에 좌우를 바라보던 고개는 땅을 향해 떨궈집니다.
숙여진 고개 뒤 스쳐가는 생각 하나가 힘 풀린 눈에 옅은 움직임을 넣습니다.
‘당신의 핸드폰엔 몇 명이나 살고 있나요?’
무겁게 잠긴 의식을 깨우는 건 버스의 정차 소리로 씁쓸한 미소가 지어집니다.
앞꿈치를 끌어다 줄 선 사람들 뒤에 서서 잊기 싫은 불편한 질문을 다시 떠올립니다.
몇 명이 사는지, 그 삶엔 숨이란 게 존재는 하는지, 막연한 오답들에 헷갈리는 저녁입니다.
‘그들의 핸드폰엔 나의 숨이 존재할까?’하는 자신 없는 자문만이 의식 속 나와 마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