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내지 못한 열병
나의 사춘기는 비교적 조용히 지나갔다.
성격이 온순하지도, 그렇다고 감정이 단조롭지도 않은 나였지만, 당시엔 내 감정을 표출하지 말아야 하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고 나 역시 필히 그래야 한다 생각했기에 그 상황이 분하거나 억울하지 않았다.
언제나 어른스럽고 성숙하다는 말을 줄곧 들으며 자랐기에 내 상태는 또래보다 안정적이었고 그래서인지 친구들의 고민 들어주는 역할을 자주 했었다.
그러나 사회생활에 뛰어든 후에야 깨닫게 된 것이 하나 있는데 나의 사춘기는 지나간 것이 아니라 깊숙이 감추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 전까지, 아버지는 다섯 식구를 먹이고 재워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여유를 가지고 있던 젊고 성실한 사업가였다.
그 복에, 갖고 싶은 것과 가질 수 있는 것의 차이를 모를 만큼 부족함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는데 유년시절, 내 장난감 바구니엔 정말이지 최신 로봇들이 넘쳐났다.
그리고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학교 앞 구멍가게로 매 쉬는 시간마다 돌진해 친한 친구들 입에 불량식품 하나씩 물려놓고 당당히 다시 교실로 돌아오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행복할 수 없었다.
얼마 후 집안이 크게 휘청거렸다. 하교 후 친구들과 숨이 터질 때까지 하던 축구가 매일의 가장 큰 사건이던 어린 시절, 우리 집 형편이 급작스레 기울어짐이 나의 눈에도 선명히 보였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우리 집 거실에서 자주 식사하며 선한 웃음을 보이던 아저씨가 가을날 낮에 술 취해 들어와 두꺼운 우리 집 현관문의 유리를 장우산으로 부수고 심장이 약한 엄마에게 세상 심한 욕을 쏟아내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엄마의 심장 소리는 품에 안겨있는 내 귀를 향해 '무섭다'며 크게 소리쳤고 덩달아 얼어있는 내 머리와 어깨 위에 엄마의 눈물이 계속 쏟아졌다.
그 후, 학교생활 역시 180도 달라졌다.
온화하던 선생님들은 어느샌가 내 머리에 꿀밤을 놓기 좋아했고 다행히 친구들로 북적이던 주위는 변함없었지만 구멍가게에 앞장을 섰던 이전의 나와는 다르게 어느덧 무리에 섞여있었다.
계산하는 친구의 지시에 따라 군것질을 계산대에 올려놓았고 괜히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집이 없어지고 전학을 했다. 다섯 식구는 옥탑에 모여 더운 날엔 지붕 옆 공간에 누워 잤고 겨울엔 최대한 창문과 떨어져 잠에 들었다.
300원의 가치는 나와 친구들 사이 선을 긋는 상징이었다. 축구하고 문방구에 다 같이 몰려 함께 먹는 불량식품의 가격이 300원이었는데 난 1주일이 지나 함께하기 버거워 항상 경기가 끝나기 15분 전에 부모님과 함께 외식하러 간다며 아이들의 부러움을 등에 엎고 집으로 뛰어갔다.
오르기 숨 가빴던 옥탑방의 현관문을 창살 사이 얇은 팔을 넣고 손에 쥔 나무판자로 문을 열면 그곳은 나의 작은 천국이었다.
공허한 공간이었고 아이들에게 말한 것처럼 부모님이 날 기다리고 계시진 않았지만 누구 눈치 보지 않고 라면이 탱탱 불 때까지 기다렸다 굵어진 면발을 혼자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위험한 옥탑을 떠나 더 큰 평수로 이사했다. 바퀴벌레 소굴을 떠나 새 집으로 이사한다는 것이 내게 큰 기쁨이었다.
이사 간 집이 커서 좋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집에 들어갈 때 주위에 누군가 지켜보고 있진 않은지 눈치를 살피게 됐다.
지하는 특유의 냄새가 있었다. 곰팡이 냄샌지 도둑고양이들 몸에서 나는 냄새인진 모르지만 그 별로인 냄새도 어느새 편안해졌다.
지하에서의 장마는 다시 겪고 싶지 않을 만큼 버거웠는데 장판이 젖어 여름 내내 불어있게 되면 잠을 자고 일어나도 누군가에게 맞은 것처럼 여기저기가 욱신거렸다.
아니, 어쩌면 장판 문제가 아닐 수 있었던 것이 장마철마다 창문 사이 공간에 몰래 들어와 새끼를 낳고 밤새 울어대던 도둑고양이들의 울음소리에 불편한 잠을 잤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 사춘기는 아주 요란스레, 그렇지만 내 감정은 들춰 볼 새 없이 지나갔다.
그래서 난 또래 친구들보다 성숙했고 또 그렇게 보여야 했다.
우리 집 형편을 알려 부모님을 실패자로 만들기 싫었고 집이 기울기 전과 같게 훌륭한 가르침을 통해 잘 자라고 있는데 괜히 친구들 눈에 편견의 렌즈를 씌워 나를 못 보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물질로 바꿀 수 없을 만큼의 가치들을 배웠던 시기를 꼽자면 단연 사춘기를 포함한 학창 시절이었지만 그 시절 배우지 못한 단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내 마음을 꺼내 놓는 방법이었다.
활발하고 주도적인 성격으로 살아오며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공감하고 함께 고민했던 나였지만 반대의 입장으로 나를 내놓는다는 것이 생각 이상으로 너무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힘든 감정이 날 마주하려 하면 외면하며 다른 것에 집중했다.
소음으로 소음을 방해했고 고통엔 다른 자극으로 반응했다.
하지만 쌓여가는 스트레스와 고민들로 소음은 더 이상 소음으로 끝나지 않았고 내 삶 전체를 잡고 흔드는 주동자가 되어 날 놓지 않았다.
그런 시간들에 치여 나약한 상태에서 내가 찾은 방법은 그래도 사람, 그리고 글이었다.
구겨진 감정을 쏟아내는 것이 어색해 꺼내놓기 가장 편안한 상처부터 하나 둘 끄적였다.
그러다 보니 신기하게도 내가 꺼낸 '상처받은 날들의 내가' 현재의 나를 위로하기 시작했고 마음에 들러붙어 혹이 된 아픔들은 하나 둘 딱지가 돼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 스스로를 위안하는 방법을 터득해 갔고 그 시간들이 점차 편해짐에 따라 나의 아픔들은 기록으로 변화해 이젠 내 삶의 소중한 지침들이 됐다.
당시엔 전혀 알지 못했다. 그토록 질긴 상처의 고름들이 이렇게 부드러운 삶의 화음이 될 거라는 사실을.
과거를 지나 현재를 살고 있는 나는 생각한다.
언젠가 아픔이 느껴지는 현재를 살게 된다면 단순히 아픈 현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가치 있는 순간을 살기 위한 준비가 이미 시작된 것이기에, 이를 기억하고 마주한 아픔에 더욱 집중하자고.
또,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치자고.
단순히 눈 앞에 보이는 것들로 전체를 판단하기엔 보지 못한 장면들이 너무 장관이라 이대로 포기해 버리면 언젠간 분명, 밀려오는 아쉬움들에 편히 잠들지 못할 거라고.
그렇기에 무슨 상황이든, 열심을 내 살 가치가 충분하다고.
열병을 앓듯 뜨거웠던 나의 늦은 사춘기는 아직 그 흔적을 달고 있다. 마주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불쑥 튀어나와 나를 또 방황하게, 아프게 만든다.
새로운 문제, 또 다른 고통.
글은 인격이 돼 날 위로하고 새로운 날들에 감정을 덧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