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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ul woon Sep 08. 2015

딸 둘에 아들 하나

많이 미안했어

“딸 둘에 아들 하나.”


우리 식구를 누군가에게 소개할 때 종종 덧붙여 쓰고 있는 표현이다.    


어릴 때부터 난 10살, 8살이 많은 누나들과 함께 꽤 오랜 시간 살을 맞대며 살아와야 했다.    

지금은 둘 다 시집감은 물론, 큰누나네 다섯 살짜리 이란성 남녀 쌍둥이, 작은누나네 세 살짜리 남아, 그리고 내년 3월에 세상 빛을 볼 예정인 작은누나의 두 번째 아이까지 총 네 명의 조카들로 난 조카부자 삼촌이다.

   

지금은 누나들 집에 놀러 가서 조카들도 보고,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누지만 누나들이 결혼하기 전까지, 특히 내가 저학년이었던 시절엔 하루건너 하루는 항상 시끄러웠다.

   

여러 일화들이 넘치지만, 그중 일 순위는 단연 방학숙제와 관련된 일화로, 내겐 맵지만 웃음이 깃든 기억이다.  

어렸을 때 내 방학숙제는 어머니가 아닌 큰누나가 검사했는데,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나는 공부 자체도 싫어했지만 방학 때 하는 공부는 더욱 싫었기에, 내 방학 숙제 기간은 딱 개학하기 3일전부터였다. 숙제를 하기 위해 책상에 앉으면, 언제나 먼저 나오는 것은 연필 아닌 짙은 한숨이었다.    


‘아 개학이 왜 이렇게 빠른 거야.’

   

누나들은 거실에서 TV를 틀어놓고 좋다며 웃고 떠들고 있을 때, 난 내 책상 앞에 앉아 방학 첫 날 이후에 처음 보는 동그라미 계획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하곤 했다.

  

‘아 이번에도 너무 욕심을 부렸나. 잠자는 시간을 너무 작게 그렸네, 공부하는 시간은 또 왜 이렇게 커.’

               

주전자 뚜껑으로 도화지에 원을 그릴 때만 해도 이번 방학 땐 범생이 느낌을 잔뜩 묻히고 오리라 호언장담했던 나였는데 어느새 다음 방학으로 그 계획을 미루고 있었다.

   

‘밀린 일기부터 쓰자. 이게 제일 티가 많이 나니까 얼른 해치우자.’

   

그렇게 시작한 첫 번째 방학숙제는 언제나 일기였다.

그나마 양심이 붙어있던 일기장 앞엔, 없던 기억까지 끄집어내어 한 페이지씩을 메웠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소재는 달아나고 손목은 왜 이리도 아프던지, 연필을 연필깎이기계에 ‘쑤욱’ 집어넣고 손잡이를 돌리면서 어떻게 하면 짧지만 대충 쓴 글로 보이지 않을까 하고 머리를 굴렸다.


일기에 축구하는 그림을 넣어보기도 하고 감명 깊게 읽었다며 예전에 쓴 독후감을 그대로 베끼다보면, 어느새 내가 글을 쓰는 건지 손이 알아서 글을 쓰는 건지, 손목의 감각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을 만큼의 시간이었다.

  

이제 거의 다 왔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새롭게 알아차리게 되는 사실은 아직 내 일기는 2주전에 살고 있다는 절망적 소식으로 고개가 절로 꺾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일기를 다 쓴다고 해도 남은 것은 체험학습부터 공부일지까지, 내가 방학 때 보낸 활동들로는 도저히 거짓말하기 어려운 것들뿐이었기에 일기가 많이 남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리 슬프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개학 전날까지도, 가족끼리 휴가 다녀온 것에 거짓말을 보태어 체험학습만 대충 마무리 하고 있으면 불현 듯 방문을 차고 들어오는 게 큰누나였다.


“너 숙제 다 했어?”


그러면 난 최대한 불쌍히 대답했다, 마치 피치 못할 사정으로 못했다는 듯이.


“아니.......”

   

말 끝나기가 무섭게 누나의 눈은 방학숙제 목록을 훑어가며 매서운 손으로 내가 한 숙제들을 넘기고 있었다.         

“체험학습일지는?”


나는 두 장이었던 일지를 앞장만 쓰윽 내밀었고, 왜 뒷장은 없냐는 소리가 제발 내 귀에 들리지 않도록 기도했다.


“야 여기 보니까 쓰라는 게 더 있구만. 다른 장 어딨어.”

“어? 아니야. 거기 있는 게 단데?”


누나의 그 빠른 손이 내 책상 서랍 손잡이에 닿으면 난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게 어디서 누굴 속이려고! 너 방학 때 뭐했어?! 어?!!”


그렇게 물을 때마다, 난 정말 대답해 주고 싶었다.

누나들이랑 놀았다고, 엊그제만 해도 같이 웃고 떠든 건 기억나지 않느냐고.


그때 난, 무슨 말을 해도 누나의 화를 더 크게 만드는 부채질이 될 뿐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고분고분 누나의 기분을 따랐다. 내 숙제가 완성되지 않은 수준에 따라서 누나가 주는 사랑의 매는 그 강도가 달랐기에, 내 눈동자는 책보다 책을 넘기는 누나의 손에 가 있었다.


한 번은 방학숙제에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상태에서 혹시 검사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감에, 운을 걸어 그럴싸한 거짓말들로만 시간을 보냈던 적이 있었다.

 

이때의 기억이 생생한 것은 조용히 넘어갔을 리 만무했기 때문인데, 예상대로 개학 전날에 또다시 숙제 검사를 하다, 거짓말이 들통 나 정말 제대로 ‘당했었'다.


참고로 그때는 겨울방학이었는데, 그 당시 내복을 위아래 입는 것은 필수였고 툭하면 동네에 눈이 내려 아이들과 꽁꽁 얼은 손으로 눈싸움과 눈사람을 만들다가 너도나도 코감기에 걸려 한창 훌쩍거리던 때였다.


강한 추위 때문에 그날이 더 기억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날의 누나 손은 추운 겨울바람보다 매서웠고 내 울음소리는 태어난 이래로 가장 컸으리라 짐작한다.

  

누나는 거짓말한 내가 괘씸해서 인지 힘껏 터져 나오는 내 울음소리에 질세라, 더욱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신나게 두들겨 맞고 홀딱 벗겨져 대문 밖으로 쫓겨났던 그날 저녁엔, 너무나도 서러워 제 멋대로 떨리는 턱을 주체하지 못한 체 꺽꺽 울어댔고, 그때 마당에 묶여있던 우리 집 개는 오랜만이지만 익숙하다는 듯, 천천히 일어서 꼬리를 흔들며 날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바람소리가 많이, 크게 들렸고 산속에서 울어대는 이름 모를 새들은 일정한 여유의 시간을 두고 “쟤는 또 저래?!” 라는 말을 서로 주고받았다.


초반엔, 대문 안에서 들리는 큰누나와 작은누나의 대화가 더 중요해 내 귀에는 그 소리들이 다 거슬릴 뿐이었지만 시간이 지나, 당분간은 아무도 날 데리러 나오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자 그 잡음들은 공포의 울림이 되었다.


혼자 있는 게 무서워 잘못했다며 더욱 크게 울어대던 그때, 꽤 오랜 시간 내 울음에 화답해 주는 것은 중간에 한 번씩 장단 맞춰 짖어주는 우리 집의 지킴이, ‘업둥이’뿐이었다.


시간이 지나 대문을 박차고 분주하게 누군가가 날 데리러 오는 소리가 들렸다.


따뜻한 발소리로 보아, 소리의 주인이 작은누나라는 것 쯤은 단번에 알 수 있었고, 이전에 걸려있던 대문의 보조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리면서부터 나는 더욱 크게 울 준비를 하고 누나를 기다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누나도 엉엉 울면서 대문을 열고 나왔기 때문에 순간 나는, 누나도 쫓겨난 게 아닌가 하는 재미 난 생각이 들다가도 귀를 치고 가는 쌩 하는 바람소리에 새 울음소리가 생각나 더 큰 울음을 낼 뻔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작은누나는 촌스러운 곤색의 오리털잠바를 나에게 덮어주며 얼른 들어가자고 재촉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짧은 순간 동안, 어떻게 하면 최대한 불쌍해 보일 까만 생각하다, ‘끝까지 우는 소리를 내자.’라는 게 나의 결론이었기에, 큰누나 신경에 거슬리지 않을 만큼의 소리로 아주 서럽다는 듯 울음을 냈다.


“너 뭘 잘했다고 울어! 조용히 안 해?!”


난 울음을 뚝 그쳤다.


누나가 너무 냉정하다 느껴졌고, 그 다음엔 ‘진짜로’ 서러워지기 시작했다. 작은누나는 화장실로 들어가 있으라 말하고 내 속옷을 챙기러 분주하게 발걸음을 찍었다.

    

욕조에 떨어지는 물소리가 화장실 전체에 울리는 게 귓등에 느껴질 때면, 나도 모르게 왠지 더 슬퍼졌다. 콧구멍이 자꾸 벌렁거려지고 콧물이 흘러내리는 게, 스스로 너무 안쓰러워 거울보기가 민망했다.

 

큰누나의 냉정한 모습이 미웠고, 더불어 내 마음 몰라준다는 생각이 계속 커지자, ‘진짜로 더’ 서러워져 크게 울고 싶었지만 작은누나가 들어오기 전까진 울지 못했다. 이유는 하나, 크게 울면 큰누나가 성난 발걸음을 쿵쿵거리며 빠르게 화장실로 들어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더 큰 지옥을 만들진 말자.’


이게 그 순간의 내 생각이자 판단이었다.


작은누나가 들어와 욕조 안에 덜덜 떨며 서있는 나를 따뜻한 물로 씻겨주는데 서러움과 후회들이 같이 쓸려 내려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울음은 참을 수가 없었으나 크게 울면 안 되었기에 작은 누나 팔뚝에 매달려 꺼이꺼이 울었다. 누나는 내 눈물이 본인 옷을 넘어 팔에 스며드는 걸 느껴 참고 있던 눈물을 내 앞에서 또 꺼내야만 했다.

            

“누나가 큰누나한테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같이 싸워서 너 데려왔어. 그러니까 울지 말고 얼른 씻자. 더 울면 또 와서 뭐라고 할 거야.”


입을 삐쭉 내밀고 울음을 참으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누나가 씻겨주는 게 끝날 때까지 얌전하게 있었다. 팬티와 메리야스를 입고 방에 들어와선 누나가 발라주는 연고를 ‘여기도 아파.’하며 내 손으로 비벼 바르고 있었는데, ‘쿵쿵’거리며 큰누나 발걸음이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작은누나 등 뒤로 숨어 옷자락을 꽉 쥐었다.


“걔 두고 잠깐 나와 봐.”


다행히 ‘걔’는 나임을 알았기에 안도했지만, 행여나 내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아 큰누나가 또 화를 낼까 봐 가장 크게 난 상처부위를 잘 보이게끔 돌려놓고 연고 바르는 데에 열중하는 척했다.      

잠시 후 작은누나가 들어왔고 나에게 물었다.

   

“치킨, 피자, 탕수육 셋 중에서 언니가 고르래 시켜 준다구.”

“탕수육.......”


작은누나는 배고프냐면서 많이 고프면 지금 바로 말하고 나서 다시 연고를 발라주고, 그렇지 않으면 연고를 다 바르고 후에 나가서 말하겠다고 했다.


나는 저녁 먹기 전에 대문 밖으로 나갔다 왔기 때문에 너무 배가 고프다고 말하면서도, 지금 바로 누나가 나가서 말하면 뭐 먹을지 바로 결정한 내 모습이 큰누나에게 미워 보일 수 있으니 연고를 다 바르고 나가라 했다.

그리곤, ‘알았어, 걱정하지 마.’라고 말해주는 누나가 너무 고맙고 미안해, 연고가 너무 따갑다며 더욱 엄살을 피웠다. 잠시 후 큰누나가 들어왔고, 공부일지와 체험학습, 다른 방학 숙제들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지시했다.


탕수육이 오기 전이라 그랬을까? 아니면 눈물을 흘리고 나니 홀가분해져 그랬을까?

이유야 어쨌든 간에 이상하리만치 집중이 잘 됐다.

쳐다보기도 싫었던 숙제들이 참 즐거웠고, 풀어나가는 느낌이 좋았다. 

한술 더 떠, 이 재미를 몰랐던 과거의 나를 자책하기도 했다.


물론, 그 느낌은 개학 후 다음 방학의 끝자락이 올 때까지 다시 있혀지곤 했던 감정이었지만, 당시엔 정말이지 숙제가 너무 즐거웠다.


그렇게 집중하며 시간을 보내던 중, 이제 좀 큰일을 해보려하는 나를 갑자기 방해하는 게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조금 전 큰누나가 시켜주었던 귀하디 귀한 ‘탕수육’이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음식을 앞에 두고 무시한다는 것은 당연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나는 설레지 않은 척 마음을 감추고 사뿐히 상 앞으로 걸어가 ‘털썩’하고 앉았다.


그날의 탕수육은 유난히 더 기막힌 맛이었고, 짜장면 그릇 안에 불어나는 국물을 보며 ‘밥솥에 밥이 있을까?’를 생각하니, 진정 너무나도 행복했다.


심지어 나를 혼낸 큰누나의 마음도 다 이해되는 것 같았는데, 누나가 아니었으면 내 성격상 절대 방학숙제를 하지 않았을 거고 그러면 학교 선생님께 엄청 혼나는 것은 뻔한 줄거리였으니, 나를 ‘생각해서’ 혼낸 누나의 마음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또, 작은누나가 나를 위해 울어준 것을 생각하며 나중에 커서 나쁜 놈들로부터 지켜줘야겠다고 다짐도 했다.

시간이 흘러 내가 고학년을 앞두고 있을 때쯤, 자유를 만끽하는 그녀들의 기분은 왠지 들떠 있었다.


교복에서 해방된 자유인들은 뒤꿈치에 밴드를 붙여가며 하이힐이라 하는 키 커지는 신발을 신었고 갈수록 거울 앞에서 색칠하는 시간이 늘어가곤 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 괴상한 신발을 같이 신어보기도 하고 덩달아 얼굴에 색칠해달라고 조르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또, 종종 누나들의 남자친구들 이야기가 오가곤 했는데, 이상하게도 난 그 대화에서 많은 질투들을 느꼈다.


그 남자들은 분명 나쁜 놈들 같았으며 동시에 누나들을 빼앗아갈 것만 같았기에 어머니, 아버지께서도 가끔 누나들의 나쁜놈들을 언급하실 때면 입을 삐쭉거리며 표정을 구기곤 했다.


그때 들었던 생각 중에 참 우스웠던 것이, ‘레고를 사주는 사람을 매형으로 인정해야겠다.’며 다짐을 했던 것이다. 물론, 부모님의 허락이 우선이지만 혹시나 내게 ‘어때?’ 하고 묻는다면 레고 없인 허락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아마 내가 많이 가지고 싶었던 장난감이 레고였던 것 같다.


나에게 레고를 안겨준 매형은 둘 중 아무도 없었지만 누나들이 결혼하던 때에 난, 한 번은 고등학생이었고 한 번은 전역한 다음이었기에 더 이상 레고를 만지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조차 그 다짐을 까맣게 잊고 있었기에, 당시엔 그 것이 탈락 기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소모적인 질투의 시절이 지나고, 던져진 세상에 부딪히며 살아가다 보니 어느덧 누나들은 ‘가정’이라는 보금자리를 마련해놓은 상태였다.


그때에, 누나들이 아이를 잉태하고 그 아이에게 세상 밖 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미안하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아이를 품고 누워있던 그때의 누나들은, 내가 방학 숙제하지 못해 혼날까 두려워하는 표정과 비슷한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설명하기에 더욱 복잡한 그늘을 얼굴에 걸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말 한마디 꺼내기가 미안했던 적도 있었다.


어릴 때부터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고 바짝 붙어 다닌 작은누나는 큰누나의 임신이 있은 뒤에 겪은 임신이었기에, 가족들도 상대적으로 여유롭게 출산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누나의 임신 개월 수가 늘어나면서, 그 생각이 착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작은누나가 ‘뭉친다.’고 하며 아파하는 것을 볼 때면, 손 쓸 수 없는 내가 너무 무능하게 느껴져 시간의 더딤을 한탄했었고, 덩달아 매형이 너무 미웠다.


그러다, 나로서도 아무것도 해줄게 없다는 걸 통감할 때면 매형의 마음이 이해되기도 하는 참 희한한 감정이 밀물과 썰물이 돼 일렁였다.


나에게 있어, 작은누나의 존재는 어릴 때부터 내가 지켜주어야 하는 사람이라 생각해왔기 때문에 누나의 임신기간 내내 가슴이 참 많이 콩닥거렸던 것 같다.


큰누나는 하나도 아닌 둘, 쌍둥이를 임신해 초반부터 몸 가누기를 굉장히 힘들어했는데, 그때의 난 군인으로, 마음대로 보러 갈수도 없어 기분이 굉장히 무거웠다. 시간이 나면, 공중전화에 매달려 누나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미안해.’라는 말 뿐이었다.


그때 큰누나는 그런 나를 보며 ‘되게’ 어른스러운 척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내게는 ‘너무 여린 아이’로만 느껴졌다.


간혹 통화가 길어졌던 날이면, 전화를 끊은 뒤 퍼런 하늘로 시선을 올려 젖은 눈을 껌뻑이던 게 기억난다.


가끔, 어릴 적을 생각할 때면 ‘큰누나에게 대문 밖으로 쫓겨난 그 추웠던 날’을 떠올리곤 했던 나는, 그때의 누나와 방금 통화를 마친 누나가 많이 다르다는 것에 마음 한 곳이 아려왔다.


우리 누나들은 내게 있어, 언제나 10살, 8살 많은 누나들이겠지만 현재는 ‘그 추웠던 겨울날’과는 달리,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지금의 내 누이들은 아주 여린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엄마라고 하는, 세상이 강하고 위대하다 말하는 그 이름에 맞춰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이기 전에 누나이고, 누나이기 전에 여자인 그녀들은 넘치는 현재의 행복에 기뻐도 하지만, 가끔은 엄마란 역할에 버거워하기도 하는 것 같아 괜한 안쓰러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누나들한테 참 많은 것들을 배웠지만 지금까지도 난 보답한 게 없어 깊은 미안함만 늘어가는 현실이다.


그래서 내가 더 분주해져야한다.

이제는 10번, 8번 더 누나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살펴주어, 받았던 관심을 조금씩 갚아야 할 것 같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누나들 삶에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철없던 시절엔 언제나 여리고 순수한 누나들이 곁에 있었다, 그날이 그리워질 때 거는 전화 한통은 세월의 흔적이 많이 녹아 괜스레 뭉클해지는 마음이다.


추억을 토대로, 우리 삼남매는 매번 감사하게 살아왔다.


누나들에게 난, 참 많은 빚을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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