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근영 May 15. 2018

레바논 마마, 재클린의 하루

여행지에서 우리집처럼 묵는 비결


여행을 할 때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숙소이다. 비싼 호텔에 묵으면 편리한 점이 있지만 비용이 많이 들고, 여행경비를 아끼기 위해 저렴한 숙소만 찾다 보면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있다. 관광객이 많은 여행지는 가성비 좋은 숙소를 찾기가 쉽지만 레바논에서는 저렴하면서 좋은 숙소를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  


 나에겐 소소한 여행 철학이 있다. 편리한 호텔보다는 조금 불편하더라도 현지인이 운영하는 민박에 묵는 것이다. 현지인의 생활상을 보고 그들과 교감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처음 가는 레바논의 생활문화도 너무 궁금하였다. 하지만 3일을 예정한 카디샤 밸리의 숙소를 예약할 때 애를 좀 먹었다. 여행자가 적은 레바논에는 게스트 하우스가 흔치 않았고, 작은 마을이 흩어져 있는 카디샤 밸리에는 마땅한 민박을 구하기가 더 어려웠다. 출발하기 전에 숙소 정보를 캐느라 몇 주일 동안이나 인터넷을 들락거렸고 마침내 눈에 들어오는 곳이 있었다. 방이 2개라 조용하고, 텃밭에서 딴 살구로 만든 잼이 맛나다는 리뷰를 보고 바로 예약을 해버린 ‘재클린의 집’.  

 

재클린 텃밭에서 익어가는 살구.


베이루트 일정을 마치고 카디샤 밸리로 향했다. 하스룬(Hasroun)이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예약할 때 주소와 함께 ‘오시는 길’에 대한 친절한 안내도 받았다. 만약 마을에 도착해서 찾기 어려우면 동네 사람에게 ‘재클린의 집’을 물어보면 알려줄 거라고 했다. 우리도 예전에는 마을에서 누구네 집을 물어보면 다 알고 지낼 때가 있었지. 거의 도착해서 골목을 잘 못 찾아 결국 길을 물어야 했지만 다행히 재클린의 집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스룬(Hasroun) 시내.


아시아 여행자가 많지 않아서 마을 사람들은 우리를 신기해하며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웰컴(Welcome)’이라고 했다. 중동 여행을 하며 우리는 알게 되었다. 레바논, 요르단 그리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외국에서 방문한 여행자에게 건네는 첫마디가 웰컴이라는 것을. ‘환영한다’는 말이 이렇게 멋지고 따스한 지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에게 우리는 웰컴이라는 표현을 한 적이 있었던가.  


하스룬(Hasroun) 시내.


우리가 도착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집주인 재클린은 어디선가 얼른 달려왔다. 재클린은 다부지게 생긴 중년 여인이었고 프랑스어 억양이 강한 영어를 구사했다. 포도넝쿨이 터널을 이루어 시원한 입구를 지나 집 안뜰로 들어서니 테이블과 흔들의자가 보였다.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며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정원 주변은 주인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재클린은 직접 만든 장미수(rose water)라며 강렬한 레드빛이 도는 웰컴 드링크를 가져다주었다.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장미 꽃송이가 입안에서 몸을 흔드는 것 같았다.  


재클린의 집 외부.


재클린의 집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포도넝쿨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장미 꽃잎으로 만들 장미수(rose water)


방을 안내받고 짐을 올려놓은 후 우리는 재클린이 운영하는 가게를 구경하러 갔다. 단출한 가게에는 그녀가 직접 만든 여러 종류의 잼, 마말레이드, 아니스로 만든 술 아락(arak), 장미수, 야채 피클, 말린 허브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재클린의 홈메이드 식품은 맛이 뛰어나 베이루트에서 사러 오는 단골들이 있을 정도라고 했다.  


재클린이 운영하는 자그마한 수제식품 가게.


재클린이 직접 만든 피클, 잼, 수제식품들.


카디샤 밸리는 해발이 높아 밤에는 이불을 폭 덮어야 할 정도로 기온이 서늘했다. 더운 한국을 떠나 피서를 제대로 온 느낌이었다. 에어컨 없이 서늘하게 잘 잔 덕분에 아침 햇살에 눈을 떴을 때 온몸이 개운했다. 1층으로 내려가니 야외 테이블에 아침상이 차려지고 있었다. 정갈하게 차려진 아침은 재클린의 정성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깔끔한 정원 테이블 주변.
정원 테이블에 차려진 아침식사.


얇은 피타 빵에 요구르트를 바르고 토마토와 오이를 올리고 올리브도 한 알 넣은 후  텃밭에서 방금 딴 민트 잎을 넣어 쌈처럼 돌돌 말아 입안에 넣었다. 모든 재료가 어우러지며 놀라운 조화를 불러냈다. 또 다른 경이로운 맛은 자타르(zaatar)였다. 자타르는 타임(thyme) 잎을 말린 후 갈아놓은 허브이며 참깨, 소금, 수막 가루를 넣고 섞은 양념을 뜻하기도 한다. 자타르에 올리브유를 듬뿍 섞어 빵에 발라서 먹거나 야채를 찍어 먹으면 맛의 신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타임 잎의 신선한 허브향과 참깨에서 풍겨 나오는 고소함, 소금의 짭짤함과 수막의 새콤함이 맛의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재클린이 직접 만든 자타르는 다른 곳에서 먹었던 자타르보다 품질이 월등했다. 

 

향긋한 민트를 쌈처럼 빵안에 넣어 싸먹는다.


중동음식에서 빠질 수 없는 양념 자타르.


피타 빵에 요구르트를 바르고 민트와 올리브 등을 올려서 쌈처럼 싸먹는다.


달콤한 맛을 경험할 차례였다. 재클린이 만든 여러 종류의 잼과 마말레이드는 한 입씩 맛볼 때마다 우리의 눈이 휘둥그레지게 했다. 살구, 복숭아, 배, 포도, 자두 등 카디샤 밸리의 햇살을 받으며 익은 과일은 당도가 뛰어나 설탕을 많이 넣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단맛이 났다. 재클린이 직접 재배한 과일로 만들었으니 싱싱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재클린이 재배하는 과일로 만든 수제 잼과 마말레이드. 피타 빵에 발라먹으면 맛나다.


배불러서 한 입만 맛보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재클린의 잼은 아침부터 식욕을 부추겼다. 우리는 또 엄청난 갈등을 해야 했다. 아직 여행 초반전인 우리의 배낭에 무거운 잼병을 넣고 남은 일정까지 끌고 다닐 것인가 아니면 3일간 먹었던 기억만 고스란히 안고 갈 것인가. 지금도 후회된다. 작은 병에라도 담아 달라고 해서 사 올 걸. 과육이 탱글탱글 살아있는 그녀의 잼은 내 인생 최고의 잼이었다.  


아랍식 커피를 일일이 따라주고 삶은 계란 껍질까지 까주는 재클린. 


아침식사 때마다 홍차와 아랍식 커피도 따로 내주고 삶은 계란도 직접 까서 접시에 놓아주는 등 그녀의 손길은 마치 엄마같이 따스했다. 우리는 재클린을 ‘레바논 마마’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녀도 좋아했다. 레바논에 엄마가 있으니 언제든지 놀러 오라며. 


엄마가 차려준 것 같은 정성스러운 아침을 먹으며 행복이 별 건가 싶었다. 내 집 같은 숙소에 건강한 유기농 식사 그리고 향긋한 아랍식 커피는 세속적인 욕심을 내려놓게 했다. 그녀에게 잼이며 자타르며 레바논 음식 만드는 법을 배우며 3일을 머물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 명소를 굳이 봐야 하나 싶을 정도로 그녀의 집은 안온했다.  


이른 아침부터 장작불을 때 배잼을 만들어 병에 담는 재클린.


다음날 아침 일찍 잠이 깬 나는 발코니에 나와 앉아 책을 읽다가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내려다보았다. 이른 아침인데 재클린은 나무를 때서 잼 만들 작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늘은 배잼을 만들 거라고 했다. 그녀가 잼을 조리는 동안 우리는 텃밭에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루꼴라 잎을 따서 입에 넣기도 하며 놀았다. 재클린은 다 조려진 잼을 병에 넣고 나서 우리의 아침식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우리도 그녀를 거들어 다같이 아침을 먹었다. 어제와 달라진 메뉴는 없었지만 맛은 어제와 달랐다. 더 깊고 더 진하다고 느꼈다. 잼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고 그녀의 텃밭을 걸으며 재료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이리라. 


재클린의 정원과 텃밭에서 자라는 허브와 과일들.


이른 아침부터 잼 작업을 끝낸 재클린은 가게로 나가 하루 종일 일하고 집으로 들어온다. 잠자는 시간을 빼면 매일 한순간도 허투루 보내는 법이 없이 부지런하다. 떠나기 전날 밤 저녁식사 후 우리는 그녀에게 얼굴에 붙이는 마스크 팩을 선물했다.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지 그녀는 신기해했다. 하얀 팩을 얼굴에 붙여줬더니 거울을 보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유령놀이를 하듯 재밌는 제스처를 취하며 사진도 찍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빈틈없이 강인한 모습만 보였던 재클린의 아이같이 천진난만한 모습은 우리를 행복하게 했다.  

 

얼굴에 흰 마스크 팩을 붙인 재클린은 너무 귀여웠다.


우리가 떠나는 날 아침, 어김없이 정성 어린 식사를 차려준 후 그녀는 외출 채비를 했다. 남편이 베이루트 병원에 입원 중인데 암이라 쉽게 낫기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오후에는 다른 게스트가 올 예정이라 병원에 머물지도 못하고 문병만 하고 와야 한다며 서둘렀다. 그 와중에도 우리에게 체크아웃 후 열쇠는 어디에 숨겨두면 되는지 알려주고, 떠날 때까지 정원에서 편하게 지내라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남편 병문안을 위해 떠나는 재클린과 함께.


왕복 5-6시간 거리를 다녀와서 또 일해야 하는 재클린. 남편이 일 년 넘게 병상에 있어 도와주는 이 없이 혼자 생활해 나가는 그녀는 얼마나 고되고 힘들까. 하지만 그녀는 찌푸리거나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우리네 엄마처럼 강인한 재클린. 빨리 그녀의 남편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우리의 레바논 엄마가 언제까지나 건강하고 꿋꿋하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  


강인하고 긍정적인 재클린의 눈부신 미소.


이전 04화 성자(聖者)의 계곡을 가다-카디샤 밸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