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되기 위한 조건
각자 저마다의 페이스로 걷는다.
순례길 위에는 정말 많은 수의 순례자가 있는데, 딱 그 수만큼 다양한 걸음 속도가 존재한다. 누군가는 사슴처럼 뛰듯이 빨리 걷고, 누군가는 약간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걷는다. 누군가는 자주 바에 들러 쉬면서 가고, 누군가는 거의 쉬지 않고 한번에 목적지까지 간다. 누군가는 동행들과 함께 시끌벅적 걷고, 누군가는 혼자서 조용히 걷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이 길을 걷고 있었다.
내 경우에는 처음에는 꽤나 빨리 걸었다. 웬만한 잘 걷는 성인 남성보다 속도가 빨랐는데, 그 이유는 스페인의 강렬한 태양을 피하기 위해 해가 중천에 떴을 때 걷는 시간을 줄이고 싶은 이유가 30%, 혹시 내가 목적지로 삼은 마을의 알베르게가 꽉 차서 남은 침대가 없을까 두려운 이유가 20%, 앞에 걷고 있는 사람을 제칠 때의 쾌감이 50% 정도 였던 것 같다. 빨리 걸은 이유를 살펴보면 내가 꽤나 더위를 많이 타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한 걱정이 많고, 경쟁심리가 강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세번째 이유와 특성에 대해서는 나도 많이 어이가 없다. 걷기 속도에 대한 순위가 매겨지는 빨리 걷기 대회도 아닌데, 왜 혼자서 경쟁심리를 느끼며 아둥바둥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걸으려고 했던 것일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꽂히는 분야에선 잘하고자하는 욕심이 많았다. 그 분야가 나이를 먹음에 따라 식물 관찰일지, 이야기 진행, 다독, 취업시험 성적 등 달라졌다. 순례길에서는 누구보다 빠른 발걸음으로 내가 더 잘 걷는다는 우월감을 느끼려고 나도 모르게 경주를 하고 있었다. 정말 유치했다.
빠르게 걷다보니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했다. 일단 발에 부담이 많이 가서 물집이 우후죽순 생겼다. 그리고 길 위에서 만날 수 있는 작은 곤충들과 들꽃들에게 시선이 가지 않았다. 바른 길을 알려주는 노란 화살표를 놓치기도 했다. 오로지 목적지만 생각하며 다른 순례자들과 대화할 기회를 차버리며 걷기만 했다. 애초에 나는 나만의 시간을 가지며 사색을 하려고 이 길에 왔는데, 사색은 커녕 정신없이 앞만 보고 걷기만 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경쟁하듯이 걷는 나의 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사실 걷기 뿐만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하려 하면 문제가 생긴다. 밥을 너무 빨리 먹으려하면, 밥맛을 못 느낄 뿐더러 꼭꼭 씹어먹지 못해서 소화도 잘 안되고 체할 수도 있다. 책을 너무 빨리 읽으려하면, 문장의 맛을 못느낄 뿐더러 그 책의 주제와 내 삶의 교점을 못 찾을 수도 있다. 인생의 중요한 문제를 빨리 풀려하면, 꼭 되도 않는 실수를 하거나 적절한 해결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적당한 속도로 했을 때 가장 좋다는 교훈을 이미 많은 경험을 통해서 쌓아왔는데,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빨리 걸으며 본질을 놓치고 있었다.
그래서 무리하지 말고, 경쟁하지 말고, 나에게 딱 맞는 속도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결심하자 마자, 나는 첫번째 동행이 생기게 되는데, 천사 같은 엘리나였다. 여섯번째날, 동이 트기 전 깜깜한 새벽에 엉뚱한 길로 가려는 어리버리한 나에게, 엘리나는 그쪽이 아니라 저쪽이라고 방향을 알려주었다. 보통 그렇게 말을 트면 좋은 길 걸으라는 뜻의 ‘부엔 까미노’를 말해주고 각자의 걸음으로 걸으며 자연스럽게 헤어진다. 그런데 엘리나는 놀랍게도 나의 속도와 굉장히 비슷해서 간격이 벌어지지도 좁아지지도 않고 계속 평행하게 걷게 되었다.
평행선을 유지하며 걷는 게 의외로 디게 어색하고 해야하나.... 분명히 같이 걷는 건 아닌데 계속 거리가 유지되어서 같이 걷는 그 기분.... 영 뻘쭘해서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우리는 나란히 붙어서 걷게 되었다. 차라리 그게 덜 뻘쭘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길을 걸을 때에는 8월의 극성수기였는데, 이맘때 순례자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이 이탈리아라고 대답했고, 가끔씩 영국이나 독일, 간간히 한국 출신이 보였다. 막상 스페인 사람들은 별로 없었는데, 엘리나는 스페인 아라곤 지방 출신 현지인이었다. 친절한 엘리나는 나와 영어 실력이 비슷했는데, 그래서 더 부담없이 영어로 열심히 대화할 수 있었다. 걸으면서 드는 생각들, 각자가 생각하는 자기 나라의 특징, 어린 시절의 추억 등에 대해서 얘기했는데, 가장 격하게 공감했던 것은 영어를 잘 못해서 다른 순례자와 대화할 때 스스로에게 너무 화가 난다는 내용이었다. 영어는 한국이고 스페인이고 상관없이 어른이들의 끝나지 않는 숙제인가보다.
다른 순례자들과 다르게 엘리나와 긴 시간동안 동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서로 걸음속도와 영어실력이 비슷해서였다. 한 사람의 속도가 크게 빠르거나 느리면 함께 걸을 수 없다. 빠른 사람은 갑갑함을 느끼고, 느린 사람은 힘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영어실력이 크게 뛰어나거나 뒤떨어면 함께 대화할 수 없다. 뛰어난 사람은 답답하고, 뒤떨어지는 사람은 미안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슷하면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다. 비슷하지 않으면 친구가 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유유상종은 정말 과학적인 속담이다. 비슷해서 나는 엘리나와 친구가 되었다. 순례길의 첫번째 동행이 그렇게 생겼다. 내 속도를 찾게 되면서.
엘리나와는 이후로 4일 내내 함께 다녔는데, 그동안 엘리나와 나의 속도는 완벽하게 똑같지는 않다는 것을 느꼈다. 엘리나는 나보다 아주 약간 빠르게 걷고, 나는 엘리나보다 아주 약간 느리게 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었던 까닭은, 엘리나는 아주아주 약간 느리게 걸으려고 했고, 나는 아주아주 약간 빠르게 걸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서로의 걸음걸이에 맞춰주려는 노력을 했기 때문이다. 같은 말로 서로에 대한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결국 나만 생각하지 않고 상대방을 배려해주는 태도가 있었기에 우리는 쭉 친구로 지낼 수 있었다.
사실 혼자 걸으면 이런 배려와 노력을 할 필요가 없어서 편하다. 나만 생각하면 되니까 아예 신경 쓸 게 없다. 그래서 혼자 다니는 걸 선호했는데, 그렇게 혼자 다니는 것보다 엘리나와 함께 걷는 것이 더 즐겁고 재밌었다. 혼자 걸을 때에는 시간도 잘 안가고, 걷는 것이 너무 괴롭고, 심심하고 외로웠다. 그런데 엘리나와 함께 걸으니 보다 씩씩해지고, 얘기하느라 시간도 잘 가고 수월하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에 피부로 와닿았다. 굳이 빨리 갈 이유가 없다면 배려하고 노력하면서 즐겁게, 함께, 걷기로 했다.
엘리나와 쌓은 추억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함께 족욕을 한 것이었다. 산솔을 향해 걷던 그 날은아주 뜨겁고 건조한 날이라서 힘들었다. 그늘조차 보이지 않아서 괴로웠는데, 걷다가 벤치가 있길래 저기서 앉을까 고민하며 다가갔다. 하지만 벤치에는 야속하게도 ‘Wake up!’이라고 적혀져 있었다. 빵 터진 우리는 계속 걷기로 하고 산솔에 도착했다. 근처 주변 식당에 족욕장이 있다길래 일부러 거기서 식사를 하고 족욕을 즐겼다. 우리 둘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고 지친 발을 식혔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둘 다 짧은 영어실력에 한탄하며 영어 공부 열심히 할 것을 다짐했다. 영어는 정말이지 비영어권 나라의 젊은이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 같다. (스페인에서 스페인 사람인 엘리나가 영어 못해서 화난다고 하는 상황이 영 이상했다)
엘리나와 친구가 되어 동행하면서 인간관계에 있어 많은 것을 배웠다. 첫째로, 비슷한 사람이면 친해지기 쉽다. 둘째로, 친밀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배려와 노력이 필요하다. 셋째로, 배려와 노력이 들지만 함께 하는 것이 더 즐겁다. 엘리나와 함께하게 된 것은 정말 큰 행운이었다. 친절한 그녀에게도, 함께하면서 쌓은 추억에게도, 무엇보다 그녀가 준 가르침에게 깊이 감사함을 느낀다. 한뼘 더 성장한 느낌이다.
엘리나는 산토 도밍고에서 자신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다시 원래 살던 지역으로 돌아갔다. 엘리나에게는 주어진휴가가 열흘밖에 없었기 때문에, 너무 아쉽지만 남은 구간은 다음 휴가를 이용해서 꼭 완주할 것이라고 했다. 순례길은 3주만에 완주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10년에 걸쳐서 완주하는 사람들도 있다. 저마다의 페이스로 각자의 상황에 맞게 걷는다. 마지막으로 함께 식사를 하면서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꼭 메일을 보내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약속을 지켰다. 그 메일에는 ‘나는 네가 다시 이 길을 걸을거라고 믿어. 그 때 좋은 사람 많이 만나길! 내 친구가 되어줘서 고마워!’라고 쓰여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