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노래는아주 어릴 때 외할머니한테 배운 일본노랫말인데요 곡조는 정확히 기억이 나는데 가삿말은 여기까지입니다.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노래가 재밌어서 흥얼거렸습니다.
혹시 아시는 분 있으실까요?
현이라는 아이가 있습니다.
나이는 3살. 두 돌이 갓 지난 여동생입니다. 이제 걸음마를 할 수 있지만 언니가 없으면 집밖으로는 놀러 나가지 못하는 아이.
하얀 피부에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가 별 같은 아이였습니다.
오빠는 8살 서울 유학 중이라 방학 동안만 시골집으로 다니러 옵니다.
우리 집은 돌다리를 건넌 산밑 관사였고 놀러 나가려면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집 앞에 큰 냇가가 있었거든요.
그날도 점심을 먹고 서울서 온 오빠랑 동네아이들이 있는 마을로 놀러 나가려고 했습니다.
이제 3살이긴 하지만 늘 따라다녀야 하는 아이 현이
"나도 가고 싶다... 언니 오빠랑."
현이가 말했어요.
이게 마지막 말이 될 줄은 그때까지 몰랐습니다.
"넌 안돼 집에 있어." 나는 단호히말했죠. 데리고 가면 나만 귀찮게 되니까요.
옆에서 엄마도
"너네끼리 다녀와라 놀다가 다칠까 싶다. 애기는 나랑 있을게."
라고 하셔서 나는 어린애를 돌보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에 동생이 따라올까 봐 떼어 놓고 후다닥 돌징검다리를 건너 장중사 아저씨 집 쪽 마을로 건너가서 또래 아이들과 놀았습니다.
그때가 (70년도쯤이었으니) 놀이라고는 구멍가게에서 번호 뽑기를 해서 풍선도 받고운 좋으면 풍선껌도 나오고요 숨바꼭질, 딱지치기, 구슬치기, 땅따먹기 뭐 그런 거가 다였죠.
가끔 개구리를 잡으러 들판으로다니고 가재나 송사리몰이도하니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마을공터한쪽에 산에서 벌목해 온 소나무들을 쌓아 놓은 더미가 있었습니다
얼기설기 통나무들을 쌓아 놓은 사이로 기어 들어가면 숨바꼭질을 할 때 숨기도 좋았습니다. 통나무집에 들어가 있으면 햇빛이 나무와 나무사이로 비쳐 들어오는 공간에뽀얀 공기먼지들이 그림같이 아롱다롱 하늘로 올라갑니다. 소나무냄새가 나서친구들과 그곳에 들어가 앉아 있는 걸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아이들과 서너 시간 놀고 있었을까요? 뿌연 황토흙먼지를 가르며 군인 지프차가 길가에 끼익 소리를 내며 섰습니다
군인 아저씨 두 분이 언덕길을 빠르게 뛰어 내려오시더니
우리들에게 묻습니다.
저는 그 아저씨를 잘 모르는데 오빠와 저를 알아보는 것 같았습니다,
"동생 어딨니?"
"집에요."
"어머니는~?"
"동생이랑 같이.."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더 이상 묻지도 않고 군인들은 통나무 다리를 성큼성큼 건너 우리 집으로 쏜살같이 뛰어갔습니다.
신나게 놀던 우리들은
'무슨 일이지?"
오빠랑 나랑은
궁금했지만 금세 사태가 심각한 것을 알았습니다.
엄마혼자 맨발로 혼비백산 정신없이 뛰어나오시는 겁니다. 몸을 던지듯이 지프에 오르자 차는 떠났습니다.
"동생이? 찾아보자."
심장이 벌렁벌렁거렸습니다. 동네아이들이랑
다시 집 쪽으로 돌아가서 여기저기 소리 내어 동생을 불러보았습니다.
"현아 현아 ~~"
하 지 만.
아무리 목이 터지게 불러도 돌아오는 건 메아리뿐이었습니다. 어디선가
"언니~"하며 아장아장 걸어 나올 것 같아서 집 둘레를 뱅뱅 돌아다니며 목이 터져라 불렀습니다.
그러기를 바랐습니다.
"엇 이거 동생 건데?"
오빠가 통나무 근처에 작은 풀 위에 벗어둔 동생의 빨간슬리퍼를 발견했습니다.
나는 주저앉아버렸습니다. 펑펑 눈물이 났습니다.
동생은 신을 벗고 맨발로 통나무 위를 건넌 것 같습니다. 진실은동생을 데리고 간회오리 쳐 나가는 시퍼런 물만알 것입니다.
시냇물의 위쪽은 어린이들이 건널 수 있게 징검다리가 있었고 발등이 겨우 잠길 만큼 얕았습니다.
그런데 아래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군인 아저씨들이 훈련을 갈 때 건너는 큰 통나무 한 개가 걸쳐져 있는데 그 밑으로는 여름에 수영을 할 수 있을만한 물이 휘돌아가는 웅덩이가 있어서 어린이들은 그쪽은 무서워 건너지를 못합니다. 현이는 늘 아빠 엄마의 품에 안겨서 다리를 건너서 물깊이를 가늠을 못했을 겁니다.
현이가 그 통나무다리를 언니오빠소리가 나는 마을로 건너가다가 미끄러진 것입니다.
노는 소리가 들렸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는데...
언니 오빠소리가 나니 더 빨리 건너고 싶었나 봅니다. 얼마나같이 놀고 싶었을까요..
건너기 전에 우리를 불렀을지도 모르죠.
'언니!!라고 불렀을까요? 빠졌을 때도살려줘!...라고도 했겠죠.
노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못 들었을까요. 아님 흐르는 물소리에 묻혔을까요?'
물에 빠지자 수영을 못하는 아이는 물을 먹었을 것이고 아랫마을로 떠내려 가다가 바위에 걸려 있는걸 마을 사람들이 발견을 했습니다.
'윗동네 아이라고는 김대위네밖에 없는데' 하고 신고가 부대로 들어갔고 부대에서 우리 집으로 찾으러 온 것인 거죠.
집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면 내가 손잡고 데리고 놀러 나갔으면 좋았을 텐데...
돌다리는 길이가 길고 통나무는 짧게 금방 건널 수 있다고 판단을 한 건지 그렇게 우리 현이는 서둘러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그때 엄마의 심정이 어땠는지 어린 나이여서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엄마는 며칠인지 몇 달인지 누워계셨던 기억이 나고 오빠와 나는 건넌방에서 죄지은 아이처럼 숨을 죽이고 있었던 생각이 납니다. 오빠는 서울로 돌아가고 말이 줄어든 엄마를 보며 자랐습니다.
서울서 이모랑 할머니도 오셔서 엄마를 위로하고 슬퍼하셨습니다.
현이는 누구보다 똑똑하고 이뻤습니다. 일본 유학을 다녀오신 외할머니는 우리 둘이를 무릎에 앉혀놓고 일본 동요나 셈 글자를가르쳐 주셨습니다.
동생은 나보다 노래도 잘 부르고 금방 외워서 할머니가 더 이뻐하셨습니다.
어린 나이인데도
'이게 나보다 더 잘하네?'
하며 시기가 났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날도 데리고 나가면 동생을 돌봐야 하니까 집에 있으라고 했던 것이었는데
아장아장 겨우 걷던 아이가 돌다리가 아닌 통나무 다리에 발을 올려놓고 언니 오빠한테 가려한 그 모습이 어른이 된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나서 가슴이 미어집니다.
훗날 이모들한테 들은 얘깁니다.
엄마가 병원으로 갔을 때는 이미 아이는 숨을 거둔 상태였고 물에 잠겨있어서 붓고 몸은 여기저기 부딪혀서 멍자국이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합니다.
곱고 고운 동생 현이가 마지막 가는 길을 언니 오빠랑 같이 놀려고 나선길이었다는 게 저는 살면서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엄마 아빠한테 죄송했고 이후로도 눈치를 보는 소심한 아이로 나도 모르게 변했습니다.
그리고 곧 아빠 엄마는 그곳 15사단 사창리를 떠나 원주로 전근을 하셨습니다.
엄마는 그 이후로 웃음을 잃으셨고
나는 국민학교에 가면서애어른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식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는 옛말을 지금 생각해 보면 평생 엄마가 돌아가실 때까지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막내가 생각나셨을 듯합니다.
엄마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메워드리고 싶었습니다. 하나 남은 딸이 옆에서 친구같이 말동무도 해주고 가려운데도 긁어주고 해 줘서 엄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