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5살이었지만 그때 뭔지도 모르고 몸에 좋다고 한 어른들의 얘기에 솔깃했습니다. 위에 거 떼어내고 살살 털어낸 삼을 우기적우기적 씹어 먹었던 게 기억이 납니다.부모님은 쓰다고 안 하고 표정 변화 없이 씹어 먹고 있는 아이가 웃기기도하고 염려스럽기도 하셨겠지만
"제발 건강해져랏!" 하는 마음이 더 크셨겠죠.
제가 그 당시에 아주 몸이 허약한 아이였거든요. 한 달이 멀다 하고 코피가 낫고 몸무게도 다른 아이에 비해 적게 나가고 입도 짧아서 반찬이 맘에 안 든다고 젓가락으로 깨작깨작거리다가 엄마한테 밥상머리에서 혼나서 밥을 못 얻어먹은 적도 있었답니다. 말라깽이 삐삐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저에게 이 귀한 산삼을 (실험도 안 해보고 의사와 상의도 없이?) 먹였던 거였겠죠?
문제는그 산삼은 몇십 년 묵은 거였다는데 제 새끼손가락 만한 거였고 제가 그날 밤 아파버린 겁니다.
몸이 뜨거워지고 뭔가 간질거리며 붕 뜬 것 같은 느낌에 밤새 잠을 못 잤답니다. 엄마 아빠는 놀라서 옷을 제치고 열을 내리며 병원을 가야 하는지 밤잠을 설치셨다 합니다. 돌다리 건너 사시는 장중사댁에 가서 상황을 설명하니 어린 아이라 그런 증세가 올 수 있다며 지켜보자 하시며 곧 나아질 거라고 하셨어요. 삼을 어린아이에게는 조심스럽게먹여야 하는 건데제 몸이 약하니 어른들도 먹이고 좋아지길 바라자 하셨던 것 같습니다.
나는 몸이 불에 덴 것처럼 밤새 시달렸지만 다행히 해가 뜰 무렵엔 가라앉기 시작하여 열이 내렸답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죠? 이후로 어느 때부터인가 몸이 가벼워진 겁니다. (명현 현상이라고 어른이 되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기분 탓이었을까요? 이후로 달래는 건강하고 씩씩한 시골아이로 잘 자랐고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어린 시절을 자연과 벗 삼아 지냈어요. 맨발로개울가도 뛰어다니고 골목대장질을 해가며 마을을 휘젓고 다녔답니다.
"나 산삼 먹은 여자야!"
제가 뛰어놀았던 마을은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명월리라는 곳인데
가끔 군부대 트럭이나 버스가 한 번 지나가면 뿌연 먼지를 일으키는 그런 흙길이었고 거의 군인 아빠를 둔 아이들이 다니는 승리 유치원은 언덕 위에 있어서 내려다보면 굼실굼실 흐르는 내천, 봄에는 진달래꽃이 천지에 피어있고 새들의 울음소리와 풀내음이 지천에 가득인 곳이었습니다.
혹 산다래를 아시나요.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게 다래맛인데요.
70년 도면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이죠. 시골집밖으로만 나가면 엄지손톱만 한 무공해 산딸기가 주렁주렁, 곳곳에다래열매가 달려 있어서 손만 뻗어 열매를 따먹으면 톡 터지는 게 꿀맛이었는데...
다래
으름이라는 속이 하얀 열매도요. 아마도 지금처럼 먹을 게 풍부하지 않아서 그랬을까요? 참 맛났어요.
으름
나이가 들어서 산을 탈 때 혹시나 하고 찾아봐도 나만 알고 있던 꿈의 열매처럼 이후로는 볼 수가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국민학교에 들어가면서 서울로 전학을 오자 시골에서 즐겼던 모든 놀이와 열매 따위는 잊어야 했습니다. 도시에서의 놀이는 다방구, 오징어게임, 숨바꼭질, 고무줄놀이 정도였죠. 자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시간이 감성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어릴 때 욕심부려 산삼을 먹어서인지 도시생활을 하면서 잔병치레는 하지 않았답니다.
체질도 확 바뀌어서 잘 아프질 않았어요.
열은 나서 혼쭐은 났지만 얻어먹긴 잘했나 봅니다.
형제가 여럿 있는 집안에서 자란 분들은 중간이 늘 치이게 된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큰애는 장남이라고 뭐든지 사주시고 막내는 내리사랑이라고 오냐오냐하시고 중간은 이리저리 치이는 상태로 물려받고 자라게 되죠. 둘째의 설움입니다. 그래서 엄마한테 칭찬받으려고 악착같이 공부도 하며 존재감을 나타내려고 했나 봅니다. 달래는 그렇게 국민학교를 들어가게 됩니다. 형제들에게 치여서 힘들었던 거 저만 있는 거 아니죠?
시간이 지나서 어른이 되니 그 시절 부모님의 마음도 알게 되고 불평했던 지난날이 후회가 되기도 하며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어요. 제가 또 한 고집했거든요.
어린애가 욕심을 부려 산삼을 먹겠다고 하여 엄마 아빠를 놀라게 해 드렸던 사건은 제가 건강을 찾은 이유로 즐거운 이야깃거리가 되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