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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 앞에서 마음을 들킨 어린이

by 깡미 Jan 08. 2025

"흑, 끅-꾹!"

"엉..흑, 꿀꺽.."


눈물이 목으로 차올랐다. 내 친구의 어머니 앞에서, 다시 말하면 엄마의 고등학교 동창 앞에서 목놓아 우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아야 했으므로, 간신히 숨을 삼키며 울음을 참아냈다.


1990년대에는 지금처럼 맞벌이 부부를 위한 돌봄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을 때도 아니었으니, 출근은 해야 하는데 나를 맡길 곳이 없었던 엄마는 지척에 살던 동창의 집에 나를 부탁하셨다. 게다가 그 동창의 딸도 하필 나와 같은 반이었으니, 기막힌 우연이나 운명으로 설명하지 않고서야 이해하기 힘든 인연이었다. 엄마는 그렇게 나를 그 집에 두고 다른 집 아이들을 가르치러 나갔다.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에도 매해 내 생일잔치에는 곱게 오색 한복을 차려입은 엄마 대신, 팥죽할멈 동화에서 방금 막 팥죽을 뒤집어쓰고 나온 것 같은 색의 마고자와 두루마기를 입은 할머니가 나타나셨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럴 때마다 속이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어 몹시 우울해지곤 했다.




어쨌거나, 나는 그날 그 집에서 처음으로 미미의 2층집과 화장가방을 만났다. 문 앞 벨을 누르면 "안녕? 미미예요!"라는 말이 자동재생 되는 그 집.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 거품목욕을 하고, 예쁘게 화장한 뒤 요리를 만들어 먹고 커피메이커로 향긋한 차 한잔까지 즐길 수 있는 인형의 집. 인형과 소품들을 가지고 놀기에 엄마가 퇴근하기 전까지의 시간은 너무 짧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친구 어머니의 밥 먹으라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면, "조금만 더!"를 외치며 장난치듯 시간을 끌었다.


결국 엄마가 나를 이 집에 맡긴 최종목적은 돌봄의 최고난이도 영역인 끼니해결이었다.


동창의 애처로운 부탁에 손을 뗄 수 없었던 친구의 어머니는 냉장고를 털어 한식대첩을 벌이는 듯, 한 상을 차려내주셨다. 촘촘히 칼집이 난 비엔나소시지, 노오란 계란말이와 빨간 케첩이 정갈하게 담긴 그릇이 눈을 사로잡았고, 생일도 아닌데 끓여주신 미역국으로 내 기를 살려주려 애쓰셨다. 그날따라 왜 집에 팥죽 할머니도 안 계셔서 내가 이 집에 와있는지 어른들의 사정은 알리가 없었지만, 종지 그릇마다 정갈히 담긴 반찬을 보고서는 왜인지 모르게 가슴이 뻐근해졌다.




"많이 먹어라, 부족하면 더 줄게."

라고 말씀하시고는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활짝 웃으시던 모습이 출근한 엄마의 모습과 오버랩되었다.


'미애는 엄마가 매일 이런 밥상을 차려주시는구나. 우리 집은 겨우 허여멀건한 무우 국물에 오징어 몇 개 둥둥 떠있는 국이랑 김치가 전부인데. 그마저도 오징어 몸통은 남동생들 차지인데. 쳇.' 고개를 숙인 채 밥을 크게 한술 떠서 목구멍의 뜨거운 것과 함께 삼켜버렸다. 겨우 숨을 삼키며 오열을 참아냈다. 방금 전까지는 미미랑 깔깔대며 웃었는데, 머릿속에 멍멍한 울림이 번지기 시작했다.


사실 반찬의 가짓수가 비교되었다기보다, 엄마의 부재로 인한 결핍이 밥상을 보자마자 빵 하고 터져버린 것이었다. 정성 가득한 미역국과 반찬, 윤기 나는 밥알이 너무 따뜻해 보였기에, 그 온기가 오히려 내 허전한 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 같았다. 배부르게 먹고 알 수 없는 쓸쓸함으로 다시 미미를 만나러 갔는데 기분은 나아지지를 않았다.


해가 뉘엿뉘엿 지평선 너머로 내려갔을 때쯤, 엄마가 돌아오셨다. 종일 잘 지냈니?라고 묻는 엄마의 속상한 얼굴이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내 마음 한켠에 서려있다. 나를 동창의 집에 두고, 다른 집 아이들을 만나는 그 낮시간 동안 엄마의 마음에도 허기진 시간이 흐르고 있었겠지. 같은 시간 속, 같은 결의 결핍이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엄마의 손끝에 묻은 피로는 차가운 공기를 뚫고도 뜨거웠다. 그 다정한 손으로 쓰다듬는 손길 아래에서 하아 안도감이 새어 나오며 마음이 녹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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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by allybally4b, sasint  on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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