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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스포인트 Oct 05. 2022

처음에는 중계차 일이 부끄러웠다.

지금은 재밌는 추억이 되었지만.


방송국에 입사해서 수습 기간에 처음으로 일다운 일을 했던 건,

중계차 일에 따라가서였다.


그날은 축구 중계가 있던 날이었다.


남들 다 쉬는 일요일에 아침 일찍부터 나와 짐을 챙기고, 그 무거운 장비들을 목장갑을 끼고.

축구 경기장 여기저기로 옮기고 있자니. 날은 덥고 땀도 많이 나고, 먼지는 있는 대로 뒤집어쓰고.


절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이런 일을 하려고

그렇게 힘든 시험을 치르고

방송국에 입사했나 싶어 한숨이 나왔다.


몰랐다.

이런 일을 할 줄은.


경영국 선배들이 “기술국은 죄다 노가다 일뿐이라, 사람들이 험해.”라고 농담하듯 경고해주신 적 있었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을 줄이야.


당시 중계를 했던 축구 경기장은 시설이 노후화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일하는 게 쉽지 않았다.


중계차 카메라 케이블을 연장까지 해가며 끝까지 풀어 가져다 놔야만 했다.

물론 케이블은 사람 손으로 직접 옮겨놔야만 했고. 그 일이 내가 할 일이었다.


방송 중계 세팅을 마치고

잠시 바닥에 앉아 땀을 닦고 있는데.

경기장 근처를 지나가던

어린아이 하나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물었다.


“엄마. 저 사람 왜 여기서 저러고 있어?”

“일하시나 보지.”

“일요일에?”

“응.”

“와, 저 사람들도 공부 못했나 보다.”

“쉿! 사람 앞에서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너도 공부 열심히 해.”


그 말을 듣고 허허 웃음만 났던 건.

내가 생각보다 공부를 잘했다는 거.

4년 장학금에 용돈까지 받고 대학에 다녔는데.

그리고 이 일을 하려고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입사했다는 거다.


그런데도 아이에게 이런 말을 듣고 있다니.

다른 모든 사실을 제쳐두고서라도.

나 역시


"앞으로 이게 내가 할 일이구나.

생각보다 힘들고 창피하네."


생각하던 찰나,

저 어린아이의 말이 귀에 매섭게 꽂혔다는 거다.


검게 변한 목장갑의 먼지를 탁탁 털고 있자니.

잠시 그런 생각도 했던 거 같다.


‘PD나 기자 시험을 볼 걸 그랬나?’


높은 경쟁률을 뚫고 힘들게 공채 시험 통과한 건 똑같은데.


나는 이른 시간 출발해 모든 준비를 다 해놔야만 하고.

그들은 방송 시작 한 시간쯤 전에 현장에 나와 지시를 내렸다.

(물론 방송국에서 더 일찍 준비한다는 건 알지만. 기술국보다 일찍 나와서 준비하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그들이 몸 쓰는 일을 하는 건 아니니.)


이런 일인 거 모르고 들어왔냐 누군가 따진다면.

진짜 모르고 들어왔다 답했을 거다.


나중에야 내 일이 즐겁고 좋아졌지만,

처음엔 솔직히 말하자면 부끄러웠다.


흙먼지 뒤집어쓰고 시작한 일은

방송에 돌입하면 자기 분야에 앉아 제대로 된 녹화에 참여하고, 그 후 다시 장비를 걷어내느라 땀을 또 흘려야만 했다.

그러다 보면 당연하게도 퇴근 시간은 더 늦어졌다.

어느 날은 새벽에 출발해 다음 날 새벽에 집에 도착하는 일도 있었다.


이 글을 읽으며,

“너만 까탈스러워서 그런 생각하는 거 아냐?”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 같다.


아니.

지금은 더 높은 자리에 계시지만, 당시 내가 알던 모 부장님 사모님은 

남편 직업 문제로

옆집 아주머니와 싸우기까지 하셨단다.


당시 모 부장님은 주조정실에서 3교대 근무를 하다가 이제 막 중계차 기술감독으로 근무지를 옮기셨다.

  

옆집 아주머니의 눈에는, 남들 출근할 때 집에서 쉬고 있는 모 부장님이 그냥 백수란 의심이 드셨나 보다.


그래서 남들에게

“저 집은 아저씨가 집에서 노나봐. 매일 보면 쓰레기 버리러 나오거나 마트에서 장 보고 있잖아.”

라는 험담을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돌고 돌아 부장님 사모님 귀에도 들어갔고, 결국 1차로 한판 붙으셨다고 한다.


“내 남편 방송국에서 일하는데, 당신이 뭔데 백수라고 소문을 내!”

라고 말이다.


그 후 부장님께선 트로트 가수들을 불러 지역 축제 축하쇼 중계를 나간 일이 있었는데.


아주 우연히 옆집 아주머니도 친구들과 함께 가수들 공연을 보러 놀러 오셨다고 한다.

거기서 모 부장님이 목장갑을 끼고 짐을 나르며,

케이블을 끌고 다니고선 뛰어다니시는 걸,

하필이면 옆집 아주머니가 목격하실 줄이야.


“뭐야. 방송국 다닌다더니. 그냥 노가다 꾼이었잖아?”


그 일로 2차로 한 판 더 싸우시고는,

부장님 사모님은 옆집과 사이가 아주 멀어지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생각해보면 내가 일을 하며 겪었던 재밌는 일 중 대부분이 중계차를 나가며 경험했던 거다.


처음에는 분명 부끄럽기만 한 일이었는데.

그 일이 어느덧 기다려지기도 하고, 어떨 땐 너무 재밌기도 했다.

정치인들이 나와 토론회를 할 땐 세상에서 가장 지루했으며,

또 나라에 큰 일이 있었을 땐

내 인생에서 가장 슬픈 경험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랬다.

나는 방송국 엔지니어로서 내 일이 좋았다.

지금도 좋아한다.

(방송국을 때려치운 마당에 일은 좋았다고 말하니 참 아이러니하다.)


어쩌면 내 백수 생활이 더 길어질 수도 있고, 내 집필 활동이 마무리되면 다시 경력직 자리가 없나 두리번거릴 수도 있겠지.

일이 싫어 그만둔 건 아니었으니까.


나중에.

아주 나중에 언젠가는 일을 하며 가장 슬프고 힘들었던 일을 글로 써 풀어낼 수 있는 시점이 올지도 모른다.


아마 그때는 내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을 거라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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