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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스포인트 Jul 28. 2022

나는 직장에서 봄날의 햇살인가, 권모술수인가

요즘 즐겨보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주인공의 직장동료들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나는 과연 직장에서 봄날의 햇살 같은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권모술수였을까.


권민우 변호사가 우영우의 취업 비리에 분노할 때.

사실 나는 그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10년 전 방송사 공채라는 거대한 산을 넘은 난,

막상 입사하고 나서야 알았다.


방송국은 정직원보다 프리랜서, 계약직 등의 직군이 더 많다는 걸.

그리고 나와 함께 입사한 사람 중 몇 명은 최종 면접에 올라올 성적이 되지 않았음에도 당시 경영진과 인연이 있거나, 이 지역에서 한가락 하는 집안사람이었다는 것을.


양심상 지금은 이런 일이 절대 벌어지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겠다.


대학 졸업 후 수년간 공채 시험에 떨어지며 고생했던 나는, 입사 당시 너무 억울했다.


누구는 금수저 물고 태어나 취업도 쉽게 쉽게.

반면 누구는 졸업하고 수없이 시험에 떨어지며, 자격증을 따고 영어성적을 올리느라 고생하고.

기껏 올린 내 토익 900의 영어성적이 비루해 보였다.

내 동기들은 고작 600점대였지만 저보다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들을 제치고 쉽게 합격했는데.


일부 대기업에서는 그렇게 가족 빽으로만 갈 수 있는 부서가 따로 있다지만.

최소한 정의를 울부짖고, 시청자의 권리를 중시하는 방송국만큼은 이래서는 안 되지.



그래서 나는 권모술수 권민우의 심정을 100% 이해했다.

(물론 드라마의 우영우는 내 경우와 달리 실력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사기업 대표이사에게는 직원 채용인사 권한이 있다고 한다.

회사의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이 아는 사람을 뽑는다고 해서, 이것이 실제로 부정 취업은 아니라는 말도 어느 변호사들이 하는 유튜브에서 봤던 거 같다.


뭐, 드라마에서 나오는 권민우야 사람에 따라 선택적 분노를 하는 악역이기에.

그를 완벽히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사회가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건 조금 씁쓸한 현실이다.


게다가, 회사에서 정치질을 잘한 동기는 나보다 승진이 빨랐다.

그 특급 승진의 이유가 지금은 퇴직한 모 이사의 권한 덕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내 능력이 부족해서 승진이 밀린 게 아니었어.’


오히려 선배들 역시 인사고과가 낮은 동기가 왜 갑자기 승진했느냐를 두고 당시 말이 많았다고 한다.

정치질도 어떻게 보면 실력이다.


내가 회사의 불합리함과 취업 비리에 분노한 것은 사실이나, 나는 사실 봄날의 햇살 최수연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방송국의 똥군기 문화를 깨고 싶었고, 별일 아님에도 신입사원들 기를 죽이고 술만 매일 먹이는 분위기를 바꾸려고 노력했다.

다른 국의 후배가 욕먹을 상황을 막으려 노력도 했었고, 후배에게는 잘못한 점을 욕을 하며 가르치기보단 친절히 알려주려 했었다.


퇴직을 앞둔 지금.

내 노력과 결심은 잘 지켜졌을까?


환송회 자리에서 같은 국 후배들이 무리해서라도 모두 참석해준 것도 고마웠고.

선배들의 따뜻한 격려와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는 말도 고마웠다.

물론 내게 괴롭힘을 심하게 가했던 선배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뭐 좋은 꼴 보자고 오겠나.

어차피 그만두는 마당에, 나도 그들에게 한바탕 쌍욕이나 해줄까 생각도 해봤지.


그래도. 그 괴롭힘을 이겨내고

회사에서 아무 일도 없을 때 나가는 것이니까.

다른 국 사람들의 실수로 방송 사고가 나는 것을 최대한 막으려 노력한 나였으니까.

연차가 차면서 선배들의 근본 없는 트집 앞에 참지 않아, 내가 비록 너덜너덜해졌을지언정.


봄날의 햇살 정도는 아니더라도, 직장 생활 중 내 위치는 겨울의 자외선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환송회 후 다른 국 후배에게서 문자를 받았다.


내가 떠나 서운하고, 삭막한 부조정실에서 항상 잘 대해주셔서 정말 감사했다고. 앞으로 좋은 일만 가득하길 빈다고 했다.


‘아. 나 그리 나쁘게만 산 건 아니었구나.’


후배에게 아저씨들 잘 부탁한다고.

꼰대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들은 아니라며 어느 정도는 진심이 담긴 말을 전했다.

전 직장을 좋게 포장한 문자를 보내고 나서야, 내 퇴사가 피부에 와닿았다.


“FREEDOM~~~!!!”


퇴사 너무 좋아.

이제 당분간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일은 없을 거다.


왜 진즉에 그만두지 않은 거지?

방송국 나와서도 할 만한 일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내 시야가 그동안 왜 이렇게 좁았던 걸까.


물론 망하는 것도 내 탓.

잘 되는 것도 내 탓인 프리랜서 생활로 들어섰지만.

지금 당장은 내 선택이 정답이라 믿겠다.


내가 전 직장에서 권모술수였든, 봄날의 햇살이었든.

퇴사한 나는 당분간 사내 정치질의 희생양이 될 일도, 직장 내 약자를 보호해 줄 일도 없겠지.


그래도 가능하다면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따뜻한 최수연 같은 사람이었다고 기억에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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