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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재 Jun 01. 2023

앙(仰) 이목구심서 29

개망초꽃

개망초(開望草)


유월의 풍현마당 잔디밭엔 군데군데 피어오른 눈꽃들이 있다.

해마다 잡초를 뽑아내어 관리하는 잔디밭이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김없이 잔디 사이에서 우뚝 솟아오른 깃발들이 있다.

이들은 씨 뿌리지 않아도 우후죽순처럼 자라나는 대지 위의 하얀 상념들 같다.

지워도, 잘라도, 무시해도 찰나를 헤집고 일어선 푸른 줄기 끝 꽃송이는 승리의 환호성이다.

잔디밭에 날아든 흰나비들인가, 초여름에 피는 작은 국화라고 할까.

더구나 소담스러운 꽃은 밝게 미소를 짓고 있어 눈에 거슬리거나 결코 미워할 수 없다.


오랫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꽃이라 불러주지도 않던 잡초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개망초, 개망초꽃!

이 이름에는 이미 그를 폄하하고 천한 신분이라는 의미가 배어 있다.

그래서 함부로 이름을 불러도 하나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다가 몇 해 전, 개망초꽃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게 된 것은 달빛 아래에서였다.


밤이 되면, 대부분 꽃은 존재를 잃게 된다.

온 우주를 덮을 만큼 거대한 밤의 망토에 가려 꽃은 보이지 않게 되고, 단지 낮 동안의 기억만으로 꽃이 거기에 있음을 지레짐작하게 된다.

꽃은 어둠에 지워지고 잊히는 것이다.


그날은 달빛이 은은한 밤이었다.

너무 환하지도 어둡지도 않아서 지상의 나무와 풀잎 위에 달의 시선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빛과 어둠의 공존으로 초목은 저 자신을 잃지 않고 수묵화의 진한 붓 자국처럼 줄기와 잎과 꽃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적 없는 공터엔 개망초꽃들이 여기저기 무리 지어 피었다.

밤바람에 하얗게 일렁이는 그 광경은 소금을 흩뿌려 놓은 소금밭처럼, 눈송이 하나하나가 얼어붙어 공중에 뿌려진 것처럼, 하늘의 별이 잘게 부서져 지상에 떨어진 것처럼, 내 눈동자에 들어차 은물결 반짝이며 출렁거렸다.

달의 실루엣에 무리 지은 꽃들은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이렇게 한참을 꽃들의 춤사위에 마음을 빼앗기고, 연이은 감탄은 밤하늘에 피어올라 퍼져나갔다.

그 이후로 개망초꽃은 특별한 관계가 되어 자주 눈에 들어왔고, 그때마다 꽃은 먼저 아는 체를 하며 몸을 흔들어주었다.


달밤에 비해 낮엔 꽃의 존재감이 뚜렷하게 부각되지는 않는다.

주위의 풍광에 조화롭게 스며들어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이는 튀지 않고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소시민의 모습이다.

무리를 지어서 모여있지 않은 한, 외따로이 솟아오른 꽃대 위에 피워낸 몇몇 꽃송이는 우리 존재 자체와도 닮았다.

우리처럼 비바람을 맞고 따가운 햇볕을 맨몸으로 감당해 내었다.

깜깜한 밤에 그도 홀로 잠들었다가 깨어남을 반복했다.

우리가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껴안고 살아가듯 그도 척박한 땅에서 곧게 심지를 세우고 꽃을 피워냈다.

이 꽃이 요란스럽고 호탕한 웃음이 아니라 작은 미소에 불과할지라도 그에겐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열매이다. 실제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꽃의 섬세한 비경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어여쁘고 정이 가는 꽃에 '개망초(亡草)'라고 이름 지은 최초의 사람은 누구일까.

물론 바다 건너 북아메리카에서 조선말의 혼란한 시기에 기차 침목에 섞여 들어왔다지만, 이런 흉한 명명(命名)에 꽃은 틀림없이 억울해하고 안타까워할 것이다.

여기에 ‘왜풀’이라는 이름도 있고, 어떤 이들은 꽃이 계란 후라이를 닮았다고 하여 ‘계란꽃’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북한에서는 ‘넓은잎 잔꽃풀’이라고 부르고, 시골 어르신들은 전국에 두루 퍼져 자라나는 것을 보고 ‘풍년초’라고도 하였는데 개인적으로 이 이름이 마음에 든다.

어찌 됐건 공식 명칭이 ‘개망초(亡草)’이므로 이젠 기존의 의미에서 벗어나 새로운 의미의 이름을 붙여주면 좋겠다.

나는 '개망초(開望草)'라고 불러주고 싶다.

비록 어감은 이전과 다름이 없지만, 의미를 알고 나면 따뜻하고 친근감 있는 이름이 될 것이다.


개망초는 늦가을에 잎을 틔워낸 후 매서운 한겨울을 온몸으로 통과해 내며 자라난다.

또한 비탈이나 공터, 묵정밭 어디에서나 자리를 마다치 않고 뿌리를 내려 정착한다.

그리고는 세상을 향해 궂은 날에도 웃음 짓는다.

자립심이 강하고 당당한 모습이다.

이렇게 개망초의 성장과 개화의 과정은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가 남다르다고 본다.

물론 그냥 지천으로 널려 있는 풀이라고 가볍게 무시해 버리고 오히려 불평하는 이들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길섶에 웃고 있는 개망초꽃을 알아보고, 걸음을 멈출 줄 아는 이들에게 기대하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 있는 모두가 나름의 의미를 지니며, 실제로 그들은 온몸으로 말하고 있다.

이를 알아차리고, 알아들으며 사랑하는 것은 각자의 몫으로 남아있다.


오늘도 강바람에 꽃이 흔들린다.

흔들리기에, 고민하고 방황하기에 꽃을 닮은 우리도 더없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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