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경재 Jun 02. 2024

밤근무

앙(仰) 이목구심서Ⅱ-44


오늘부터 밤근무다.

이 근무는 21시부터 익일 08시 30분까지다.

보통 한 달에 2~4일 동안을 하게 된다.


근무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어르신들의 수면과 건강상태를 살핀다.

원 내외를 라운딩 한다.

기상 전까지 기저귀 교체 및 신변처리를 돕는다.

기상벨을 울린 후 세면을 돕고 아침미사 참석을 지원한다.

아침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이동하고 식사보조를 한다.

약복용을 확인한다.

업무일지를 기록하고 체크한다.

출근한 주간 직원에게 업무를 인계한다.

그 외에 각종 돌발상황에 대처하는 것 등이다.


홀로 이십여 분의 남성 이용자들의 밤을 책임지는 일이다.

한 마디로 부담스럽고 힘들다.

더구나 천하장사보다 힘이 센 '잠'과 날이 밝도록 고군분투하는 일이 더욱 그렇다.


나는 밤중에 일어날 수 있는 온갖 위험을 예방하는 최후의 보루다.

점령군처럼 마을에 주둔한 어둠군대로부터  정문 지키는 병사다.

유리항아리같은 어르신들의 꿈이 깨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파수꾼이다.

꿈틀거리는 밤의 심장부에 깊숙히 침투하여 뛰는 심장의 소리를 엿듯는 침입자다.

멀리서 찾아오는 새벽을 깨어 기다리다 처음으로 창문을 열어 맞이하는 이다.


어떨 땐 내가 양초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몸을 태워 주위를 밝히느라 점점 작아지고 아가기 때문이다.

모서리부터 녹아가는 얼음처럼 소진해 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나는 오늘 만큼의 젊음을 팔아 그 값을 받고 있다.

매달 받는 급은 떼어 준 시간과 에너지에 대한 가다.


"별일 없었습니다"

이 말은 대부분의 밤근무자들이 간절히 염원하는 근무 후 보고다.

밤사이 일어난 수많은 불안과 졸음과 업무가 응축되어 표현된 단문이다.

이 말 뒤엔 평화로운 밤에 대한 안도와 감사의 감정이 뒤섞여 있다.

이 간단한 보고를 하기 위해 잠의 신 '히프노스'와 실랑이를 하고, 책임이라는 쌀가마를 어깨에 진 채 밤을 새워 일했다.

짧아서 말하기는 쉽지만 말하기까지의 과정은 절대 만만치 않다.


되돌아보면 밤사이에 어르신의 선종, 응급실행, 낙상, 다툼 등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적이 많았다.

이런 날이면 업무 보고가 무겁고 길어지게 된다.

상황에 따라 시말서나 경위서가 첨부되기도 다.

조용하기에 따분하고 지루하게 보낸 밤은 언제나 우리 근무자들의 소망이 되어왔다.


그렇다고 밤근무가 긍정적인 점이 없는 건 아니다.

침묵을 알고 자기 자신과 대면할 자세가 다면 더없이 좋은 시간이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지금처럼 문자를 생산하거나 독서를 할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마음먹기 나름이다.

고독을 즐기는 이에겐 특별한 기회일 것이다.


믹스커피 두 잔이 나를 버티게 한다.

출근해서 한 잔, 아침 퇴근 전에 또 한 잔.

어쩌면 커피가 나 대신 밤 근무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달큰한 커피가 위를 따뜻하게 데우면 몸속의 세포들이 일제히 일어나 환호성을 지른다.

이 응원의 힘으로 밤길을 걷는다.


태양이 동녘 산머리를 한참 벗어나 대지를 데우고 있을 무렵 퇴근을 한다.

얼굴에 와닿는 햇살이 제법 따갑다.

발걸음은 피곤에 쫓겨 묵직하니 자꾸 신경이 쓰이고 눈은 아프도록 부시다.

햇살에 세포들이 화들짝 놀라 닭살이 돋는다.

집에 와 재빨리 씻고 방안을 최대한 어둡게 한다.

누워보지만 잠이 달아나려 한다.

생체리듬은 눕지 못하게 손발을 잡아당기며 그 무언가를 하도록 조종한다.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지난 밤새 그토록 씨름하며 쫓아내려던 잠에 맥없이 허물어지고 만다.

항복!




매거진의 이전글 부엉이 바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