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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해원 Oct 21. 2023

허물어지는 경계

이름 없는 관계_15

© 해원



<윗집 일기>


“우리야~”

아침 일찍 할아버지가 찾아왔다. 둘째 이음이와 막내 ‘우리’가 달려간다. 문을 여니 아랫집 할아버지가 플라스틱 통 하나를 들고 있다. “으름이 많이 열려서 좀 따왔어.” 플라스틱 통 안에는 방금 딴 으름이 들어있다. “‘우리’는 으름 별로 안 좋아하니까 하나는 작은 걸로 땄어.” 뚜껑을 열어보니 하나만 보통 으름에 절반만 하다. 길쭉한 으름사이에 하나만 작고 동글동글 한 것이 마치 ‘우리’같다. 아이들 표정이 밝아진다. 아침 일찍 할아버지를 보게 된 것도, 좋아하는 으름을 받게 된 것도 기쁜 것이다. 으름을 좋아하는 이음이의 표정이 특히 밝다.


며칠 전 이음이가 너무너무 맛있으니 엄마도 꼭 맛봐야 한다며 나를 잡아 끌었다. 편식과 편견이이 심한 나는 그동안 이상하게 생긴 으름을 먹기가 겁나 계속 피해 다녔다. 두꺼운 껍질 속 반투명한 과육 사이로 수십 개의 검정색 씨가 보이는 이 열매를 어떻게 입속에 넣으란 말인가. 나는 물컹한 식감도, 딱딱한 견과류도 싫어한다. 다행히 작년까지는 으름이 열리는 수가 적어 양보하는 척 넘길 수 있었는데 올해는 어찌된 영문인지 수십 개가 달려버리는 바람에 피할 수가 없게 됐다. 이음이가 나를 끌고 오자 할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커다란 사다리를 들고 나타났다. 할아버지도 나의 반응이 궁금하신 것 같았다. 으름을 먹기 위해서는 따는 사람과 으름의 눈치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 잘 살피다 껍질이 살짝 열렸을 때 따야 하기 때문이다. 너무 조금 열렸을 때 따면 덜 익어 떫은맛이 나고 너무 열릴 때까지 그냥 두면 벌레에게 선수를 빼앗긴다. 


할아버지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적당히 벌어진 으름을 따주셨다. 때 마침 지나가던 할머니도 부르신다. “여보, 이리 와봐. 해원씨 으름 처음 먹어본대.” 세 명의 어린이와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총 다섯 명의 사람들이 나를 둘러쌌다. 34년생 인간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으름 먹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서다. 나는 주사 맞을 때도 한 방에 맞지 못하는 인간이다. 활짝 열린 으름을 받아놓고도 한 번에 먹지 못하고 이리저리 살핀다. 호기심 가득한 다섯 사람의 눈이 모두 나에게로 향해있다. 나는 그 시선에 못 이겨 조심스레 으름 속으로 혓바닥을 밀어 넣었다. 무수한 씨들 사이에 흘러나오는 뭉근한 과육들이 부드럽고 달짝지근했다. 바나나를 좋아하는 이음이가 바나나 맛이라고 하던데. 정말 그랬다. “거봐, 맛있지?” 이음이는 내가 답하기도 전에 확신하며 묻는다. “그러네, 보기보단 맛있네.” 나를 쳐다보던 다섯 사람의 눈이 그제야 편안해 진다. 


할아버지는 그때 내 모습에 안심 하셨는지 이번에는 우리집 가족 수에 맞춰 다섯 개의 으름을 가지고 오셨다. 으름을 전해주고 뒤돌아 가려는 할아버지에게 이음이가 다급하게 소리친다. “고맙습니다~! 아, 아니 아니 고마워!” 그러고는 문이 닫히기 직전에 재빨리 한마디 더 덧붙인다. “고마워 김종도!” 그리고는 문이 닫히자 안도의 한숨을 쉰다. 김종도는 아랫집 할아버지의 이름이다.


이음이가 다급하게 할아버지 이름을 부른 이유는, 할아버지와 다시 친구가 되기 위해서다. 며칠 전 ‘우리’가 대뜸 이음이 앞에서 자랑을 했다. “할아버지랑 ‘우리’랑 친구다?” 이음이도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나도 할아버지랑 친구야.” 이음이는 이 사실을 확인 시켜주려고 할아버지에게 가서 물었다. “할아버지, 우리 친구 맞죠?” 할아버지의 답은 이음이의 예상과는 다르다. “이음아 너는 이제 나한테 ‘요’자를 붙이잖아. 친구끼리 ‘~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딨냐? 그러니까 이제 친구 아니지.” 학교를 가면서부터 부쩍 존댓말을 쓰는 이음이가 내심 서운하셨나보다. 머쓱해진 이음이는 이렇게 말했다. “알겠어. 그럼 이제부터 ‘요’자 안 붙일게!” 그 뒤로 이음이는 다시 할아버지 이름을 부르고 반말을 하며 다시 친구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이음이가 ‘우리’ 만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우리집 2층 내 책상 앞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다. 창밖으로 아랫집 할머니 할아버지네 마당과 정원이 한눈에 보인다. 나는 그 창 너머로 할아버지와 아이들의 세상을 본다. 서로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기도 하고, 한바탕 싸우기도 하고, 신나게 웃기도 한다. 여섯 살 꼬마와 환갑을 넘긴 할아버지가 서로의 이름을 서슴없이 부르는 이 관계에는 그 어떤 경계도, 이름도 없다. 나는 그저 가만히 바라본다. 문득 시 하나를 떠올린다.


똥 누고 가는 새 / 임길택


물들어가는 앞산바라기하며

마루에 앉아 있노라니

날아가던 새 한 마리

마당에 똥을 싸며 지나갔다


무슨 그리 급한 일이 있나

처음엔 웃고 말았는데

허허 웃고만 말았는데


여기저기 구르는 돌들 주워 쌓아

울타리 된 곳을

이제껏 당신 마당이라 여겼건만

오늘에야 다시 보니

산 언덕 한 모퉁이에 지나지 않았다


떠나가는 곳 미처 물을 틈도 없이

지나가는 자리마저 지워버리고 가는 새

금 그을 줄 모르고 사는

그 새


시인이 보았던 새를 떠올린다. 뛰노는 아이들과 할아버지를 본다. 시인의 마음과 내 마음이 닿아있음을 느낀다. 할아버지와 아이들의 세상에, 경계 없는 이 관계에 나는 그만 울컥 하고 만다. 무수하게 생겨나는 경계들 속에 하염없이 허물어져 가는 이 관계에 안심이 돼서. 금 긋지 않고 날아가는 새처럼 자유로워서. 우리 관계의 이름은 여전히 정의 내릴 수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름을 붙여도 괜찮다고 생각 했다. 



<아랫집 일기>


2023.10.3

엄마가 아이를 지켜보듯, 아이들 셋이 엄마를 빤히 올려다봅니다. 우물우물 씨앗은 삼키지 말고 후우 뱉으라고, 아이들이 엄마에게 일러줍니다. 엄마에겐 첫 도전입니다. 지난해 또 그러께만 해도 마을길 아래, 사다리에 올라가거나 장대로 따야 했던 으름이, 올해는 집을 나서면 바로 길 건너편 이음이 손이 닿을 만한 곳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습니다. 열매에 금이 가기 시작하고 어느덧 쩍 벌어지면 달큼한 맛도 맛이지만, 입안에 모아 까만 씨앗을 하늘 높이 뱉거나 서로 얼굴 쪽으로 뱉고는 달아나는 놀이를 더 좋아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서툴러 발 아래 침을 흘리듯 퉤퉤 씨앗을 뱉아 놓습니다. 그동안 엄마는 낯선 과일인데다 모양이 이상하게 생겨 먹어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으름 속을 입 안에 넣고 오물거리는 엄마를 조바심치며 올려다보는 아이들을 보니, 이럴 땐 엄마가 아이 같고 아이들이 엄마 같습니다.


2021. 3. 15

아이들 말처럼 나는 이제 ‘늙은이’이어서 아이들만큼 높이 뛰거나 빨리 달리지 못해요. 놀이기구인 ‘방방’ 위에서 놀 때도, 나는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거나, 누웠거나 엎드려 있지요. 아이들은 내 둘레를 방방 뛰어다니다가 마치 나무 위를 오르듯 내 등을 타거나 내 목을 두 손으로 휘감고 놀지요. 링 위에서 레슬링을 할 때는, 울림이 혼자 편을 먹고, 나는 이음이와 ‘우리’와 한 편을 먹어요. 먼저 이음이가 나섰다가 힘에 부쳐 ‘터치’라 하며 내 손바닥을 치면 내가 나가 싸우고, 내가 힘들면 ‘우리’와 터치를 하지요. 고라니처럼 겅중겅중 뛰어다니는 울림이는 이제 아무도 상대할 수 없어요. 아이들이 킥보드를 타거나 두발자전거로 쏜살같이 내달릴 때도, 나는 길 한쪽에 비켜서서 서로 부딪치거나 비탈로 떨어지지 않도록 손짓을 하거나 크게 소리치는 일밖에 하는 일이 없지요.


2019. 9. 10

아내 보고는 장난스레 ‘할멈’ 이라 부르고 나한테는 ‘늙은이’ 라고 하더니, 내 이름을 알고부터는 ‘김종도’ 하고 소리칩니다. 나는 ‘왜!’ 라고 대답합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아이들은 나를 ‘종도쌤’이라고 불렀습니다. 곁에 선생님들이 버릇 없다고 넌지시 아이들을 꾸짖기도 했지만, 교감 일을 맡게 되었을 때도 아이들은 한결같이 내 이름을 불렀습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어느 신부님이, 내가 교실이나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섞여 공을 차고 엉켜 뒹굴며 뛰어노는 것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아이들이 내게 와서 자연스레 어깨동무하는 건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울림이가 내 머리에 모래를 뿌리고 달아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른들은 걱정하지만, 나는 그 때 울림이를 어떻게 골탕 먹일까 하는 궁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울림이가 내 이름을 알고 불러 줘서 참 좋습니다. 학교와 어린이집으로 가는, 울림이와 이음이를 태운 차가 비탈을 미끄러지듯 내려갑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곁으로 세월이란 강물도 스르르 흘러갑니다.


2018. 10. 26

가운데 금을 그어 놓고, 저 쪽은 ‘만화영화 속 세상’ 이 쪽은 ‘만화영화 밖 세상’으로 나눠 우리는 ‘만화영화 놀이’를 합니다. 나는 흙바닥에 퍼질러 앉아 만화영화 속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구경합니다. 한참 놀다가는 저희들도 모르게 이 쪽으로 건너와 공룡자동차를 가져갑니다. ‘야, 울림이 너 투명인간이냐’소리치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이 쪽 세상과 저 쪽 세상을 넘나들며 놉니다. 에라 모르겠다 나도 금을 넘어가, 싸우다 넘어진 이음이를 구출해 이 쪽 세상으로 건너옵니다. 금은 굳어지고 높은 담이 되어 더는 두 세상을 넘나들지 못할 때 우리는 어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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