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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해원 Oct 22. 2023

아랫집 선생님께

이름 없는 관계_16

© 해원



선생님, 안녕하세요.

매일 마주 보고 하는 인사를 이렇게 글로 적으니 새롭게 느껴집니다.


어느새 날이 많이 추워졌습니다. 시골의 계절 변화는 다음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아갑니다. 요즘처럼 날이 좀 추워지면 온수매트와 난로를 꺼내어 다가올 겨울을 대비해야 하니까요. 기름통에 기름이 차 있는지도 살펴야 하고요. 항상 오늘을 헤쳐나가기 바쁜 저는 두 분의 움직임을 보며 다음 할 일을 배웁니다.


'베어 놓은 깨를 옮기시는 걸 보니 비가 오려나 보다.'

'땔감을 준비하고 계시는 걸 보니 겨울이 오고 있구나.'

'완두콩을 심으신걸 보니 곧 봄이 되겠다.'


어느덧 저희가 이곳에 살게 된 지도 5년이 넘어갑니다. 한 살이었던 막내 '우리'가 여섯 살이 되고, 어린이집 다니던 울림이 이음이도 초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이제 울림이는 곧 중학생이 되고 '우리'도 학교에 가겠지요. 그 시간들 사이사이에 선생님들과 아이들, 그리고 저희 부부가 함께 만들어간 이야기들이 가을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켜켜이 쌓여 갑니다. 저는 그 낙엽들이 쉽게 바스러지지 않게 마음속 두꺼운 책 하나에 끼워 둡니다. 그러면 잠시 잊혀지더라도 어느 날 발견해 환히 웃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께서는 갓난아기 때부터 보아온 '우리'와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둘 사이에는 그 어떤 의심이 없다고요. 보이는 것에만 현혹되는 세상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도 믿을 수 있는 관계가 있다는 것에 안심이 되었습니다.


선생님, 저는 아직도 지나온 시절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훔치곤 합니다. 아름답게 남겨진 추억을 그리워하는 마음, 그리고 지금도 붙잡지 못하고 흘려보내게 되는 아름다운 순간들이 안타까워서요. 그런 저의 모습을 보고 할머니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추억에도 무게가 있어서 그래요."


지나간 추억이 그리워 눈물을 훔치게  때면 그때 해주셨던 말이 자주 떠오릅니다.  무게를 짊어지고 사는 것이  슬픈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언젠가  져버리고 싶은 날이 온다면 무게를 더해주는 추억들이 저를 너무 멀리 가지 않게 붙잡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터를 잡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것도 그래서   같습니다. 묵직하게 쌓여있는 우리의 추억을 두고 가기 아쉬워서, 보이지 않는 것들로 충분할  있는  관계를 오래오래 맺고 싶어서요.


서로의 세계에 불쑥 들어가지 않아도 곁에서 함께 발맞추어 갈 수 있는 관계가 있다는 것에 아득했던 세상을 살아갈 용기가 생깁니다. 우리가 살아갈 세상이 아직 괜찮은 곳 일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생겨납니다. 선생님들과 이웃하고 살 수 있어 참 감사합니다.


2023년 가을, 해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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