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Life BGM 2 14화

LifeBGM |깨끗한 눈밭은 시리고

Alexander Scriabin ‒ 2 Nocturnes, Op.5

by Ggock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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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부터 아무 기력이 없습니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갓 태어난 해年에게 무슨 야망과 목표가 있어서 경주의 스퍼트를 달리듯 기세 좋게 달리겠습니까. 심지어 귀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추운데 몸을 웅크리며 두꺼운 이불에 파묻히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여전히 나는 한 해의 시작이 겨울인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세계의 어느 나라는 분명 덥게 한 해를 시작할 것이고 더운 연초는 어떤 기색을 띠는지 궁금합니다. 내가 가진 삼십몇 해마다 한 해의 시작은 늘 추웠고 그때마다 언 코 끝이 녹아 훌쩍거리는 소리를 내며 차가운 얼음을 깨야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한 해의 시작에 엉겨 붙은 지저분한 생각더미를 끌어안고 차가운 시작에 발을 들이지 못했습니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건 새로 얻는 것보다 버리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지는 일이고,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듯합니다.

이럴 때마다 레마르크의 소설 「리스본의 밤」에 나오는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이름을 바꾸는 풍속이 있는 어떤 동아시아 나라의 이야기입니다.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은 일본의 조하츠(증발蒸発)현상으로도 설명됩니다. 매년 자발적으로 이름을 바꾸고 증발, 자발적으로 실종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나는 증발되기 어려운 현상입니다. 나는 미련이 매우 많으며 후회와 과거를 곱씹고, 그것을 좋은 말로는 회상이라 부르며 애지중지하는 인물입니다. 나는 증발될 수 없고 실종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겨울은 매우 건조하지만 눈은 증발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더위에 증발해 버리는 여름과 달리 겨울은 눅눅하지 않고, 얼고 쌓이고, 쌓인 것이 녹을 때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한 해가 겨울에 시작되는 몇 안 되는 좋은 이유일 것입니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도 좋지만 나는 스크리아빈을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가 러시아 사람인 것이 이 추위에 가산점을 부여했을지도 모릅니다. 스크리아빈의 음악은 깨끗한 눈밭을 걷는 음표 발자국이 느껴집니다. 조금은 서럽고, 조금은 아쉽고, 조금은 힘겨운 서정의 걸음으로 흰건반 위를 시리게 걷는 검은건반 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차가운 호흡이 폐에 맺히고 눈 끝과 코끝이 붉게 서려 물방울이 맺힙니다. 그것은 감정의 동요가 아니라 깨끗하게 빈 설원의 증발되지 못하고 쌓여 뽀득하게 밟히는 흰 미련의 시간이라서 작년을 넘어오는 길에 신발에 묻어도 굳이 닦아내지 않아도 될 유일한 기억들입니다.


깨끗한 눈밭으로 남은 작년의, 작년이라 말하기도 부끄러운 아흐레 전까지의 창백했던 날들을 떠올리십니까? 겨울은 그것을 희고 차게 남겨 드리우고, 첫걸음부터 너무 수고스럽게 뛰지 마시라, 너무 단칼에 버리고 가지 마시라 붙잡는 시린 애원으로 깔렸습니다.

겨울에 굳이 한 해를 시작하는 것은, 체온을 옹신 하기 바쁘고 길고 어두운 밤을 힘겹게 넘어가시라는 게 아니고, 첫걸음은 늘 작고 조심스럽게 매만져 가시라는 작년의 작별인사려니, 보내드리는 길은 희고 깨끗하길 바라는 마음이려니.


깨끗한 눈밭은 시리고, 겨울에 넘어가는 해年는 따뜻하지 않아서 도리어 날벌레도 떨어져 나가고 얼어 죽어야 하는 것들이 시들고 야생곰과 독뱀이 동면에 들어 안전한 흰 밭이려니, 이 시리고 깨끗한 길을 걸어 여름으로 나아가라는 1월에만 우수에 스크리아빈을 듣다 잠드는,


아직 작년의 피로가 남은 얼얼한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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