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영트리오 - Lighthouse
나는 이 세계가 괴롭습니다. 그것은 내가 괴롭고 세계도 세계 나름대로 괴로워 괴로운 둘이 만나 더욱 괴롭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서로의 괴로움을 과시하며 연민에 대한 갈구를 폭력적으로 휘두르며 삽니다. 이 세계는 비난과 조소로 뒤덮여 충분한 일조량을 받지 못하며 낡아갑니다.
나는 이 세계가 슬픕니다. 괴로운 세계를 너무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줄지어 너무 열심히 걷습니다. 진실한 삶의 그림자는 그러나, 그리 질기지 않고 아주 잠깐만 우울에 동조해 줄 뿐입니다. 나는 세계의 그림자를 주우며 부지런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싶어 집니다. 감히 신의 일을 탐내는 것입니다. 사랑의 책무를 지닌 신은 하루치의 슬픔과 괴로움을 가득 흡수한 그림자를 주우며 밤마다 끌어안고 울 것입니다. 나는 밤바다를 마주하며 신의 설움이 거기에서 파도치는 것을 봅니다. 짐가방을 망망대해에 던지고 싶은 이유도 제발 내 설움을, 이 세계의 괴로움과 슬픔을 가져가 주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on 박진영트리오 - Lighthouse등대
나는 등대가 필요합니다. 등대는 외롭습니다. 괴로운 세계, 슬픈 세계에 우뚝 서서 설움 너울 치는 바다에 빛 비추는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사람은 낮보다 밤에 훨씬 더 위태롭고 괴로움을 신에게 맡기기 위해 잠에 들지만, 어떤 밤에는 늦도록 먼바다로 직접 헤치고 나가는 고단한 헤엄을 칩니다.
해가 저물어 세계의 그림자가 밀려드는 때, 배 한 척 없는 가난한 사람은 밀려드는 하루치 짙은 마음에 숨이 가쁩니다. 이것이 내가 세계를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음악으로 세상을 위로할 줄도 모르고 형형색색 그림으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전할 줄도 모릅니다. 이 세계에는 티 나지 않은 재주로, 세계를 위해 아파하는 재능으로 묵묵히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는 잎새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시인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등대같이 서서 홀로 인적 없는 험한 밤바다에 요동치는 세계 위를 빛으로 비추려 애씁니다.
가끔 그들은 신이 세상의 괴로움을 끌어안고 우는 소리를 비추기도 해서, 그럴 때마다 선뜩한 마음 주체하지 못해 떠는 손으로 어떤 말들을 쓰기도 합니다. 그런 말들을 읽으며 간간히 걸어가는 사람을 위하여 또 빛을 비추기도 합니다.
나는 이 음악이 필요합니다. 시인의 마음이 깃든 음악이 필요합니다. 등대로 잔잔히 물결을 거슬러 노 젓는 선율을 연거푸 들으며 전구를 갈러 갑니다. 캄캄한 세계를 사랑하기 위해서, 또한 신이 세계를 위해 울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밤으로 나아가는 저녁의 응원가가 필요합니다.
이제 곧 가로등이 켜지는 시간, 일정한 거리마다 서 있는 전구를 알알이 꿰며 걷습니다. 저녁을 이렇게 걸어 들어가지 않으면 조그마한 사람의 마음은 버텨내지 못할 것입니다. 이 음악은 가끔 월광 같은 빛을 내어 어둑해지는 거리를 견뎌가며 걷게 합니다. 먼저 불을 켜고 있던 선배들은 벌써부터 우묵한 눈가로 아직 어두운 먼 마음을 비추고 있습니다.
괴로운 세계를 비추기 위해 나아가는 행렬이 보입니다. 대단치 못한 속도로 등대 쪽으로 걷는 자들은 모두 외롭고 괴롭고 슬프지만 가끔 우리를 위한 음악이 있어 무섭지 않습니다. 괴로움이 넘실대는 쪽으로 걷는 자들을 위한 음악입니다.
누구든 괴롭지 않을 수 없는 세계의 저녁이 깃드는데, 집집마다 등대를 하나씩 놓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의 고단한 마음이 미처 먼바다로 향하지 못할까 봐 몇 명의 시인이 전구를 들고 반대로 걸어 나옵니다.
나는 이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비정한 뭍으로 올라온 사람의 복작한 거리를 지나 넓지 않은 방 한 칸에 거두는 작은 생이 파닥거리는 말이 많은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그림자를 주워 안아주고픈 마음으로 등대를 들이는 저녁, 불빛이 조용히 젖은 땅을 말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슬픔이 서걱거리며 내일의 세계를 준비합니다. 쉽게 잠들지 못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야겠습니다.
나의 노래
황학주
오늘도 즉흥곡 끝자리에 앉아 있자니
파도는 제 몸의 관절들로 다시 기억을 꺼내오듯
밀려온다
등허리 굽고 흰건반
가장 약하게 온 파도에
실을 수 있는 음만 얹은
내 시간이 끝날 때
내 이야기가 빠진 그 음을 누가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정녕 마음은 음력의 해안을 바꾸며 산다 할 수 있네
물이 들고 날 때마다 낯이 변하는
노래는 어디까지인가 불어가고
아, 누군가는 나를 흩어지는 음으로만 가질 수 있지
(하략)
-황학주, 『사랑은 살려달라고 하는 일 아니겠나』, 문학동네시인선124, 中 <나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