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겐 누구나 세 가지의 ‘자아’가 존재한다고 하지? 공적인 나, 개인적인 나, 그리고 비밀의 나. 영화에서 보고는 심히 공감이 됐었거든! 그런데 오늘 그 문장이 현실이 되는 경험을 바로 했단다. 35년 전쯤 대학 초년 생 시절 ‘학보사 동기’ 기자로 만나 가장 치열했던 청춘의 한 때를 함께 울고 웃었던 친구들을 만나서 말이야. 이제는 중년으로 접어든 친구들 중, 몇은 여기저기가 아프다고도 하고, 그런 친구들을 보며 또 몇, 몇은 운동을 해야 우리가 ‘건강수명’을 유지할 수 있다며(엄마 포함) 때 아닌 열변을 토하기도 했었단다.
멀리 서울에서, 경주에서 친구들 만난다고 몸살 기운에도 달려와 준 그들이 너무 고맙고 반가워, 엄마는 괜스레 눈물이 찔끔 날 뻔했구나. 그런데 지난해 이 무렵 친정엄마를 하늘로 떠나보낸 친구가, 기일이 다가오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다고 펑~펑 우는 데, 우린 누구랄 것도 없이 그 맘을 공감하고 함께 눈물 지었단다. 자식이기도 부모이기도 한 우리의 맘이 오롯이 하나가 돼 들썩이며 눈물을 흘리는 풍경! 너는 아직 그 기분이 어떤 것일지 알 수 없겠지만 말이야. 그런데 언제 어디서나 해맑기만 했던, 그래서 엄마의 성정으로는 때로 공감할 수 없었던 이 친구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잠시 놀라기도 했었다.
아, 어쩌면 이 친구의 ‘초 인사이더적인 공적인 자아’가 워낙 강해서 우린 이렇게 여리고 감성적인 부분을 놓칠 수도 있었겠구나! 해서 말이지.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고. 그렇게 아주 개인적인 자아를 드러내지 않고 눌러가며 살아오기까지 얼마나 불편하고 힘들었을까? 다시 한번 공감이 돼 이번에는 가슴으로만 꺼이꺼이 울었단다. 그래도 말이야~엄마도 이 친구들 앞에서라면 ‘할 말 다하고 지극히 이성적이어서 두려움도 없는 공적인 나’를 내려놓고, ‘까칠하기 그지없고, 상처 받기도 잘하며 나만의 동굴이 너무 깊고 어두운, 비밀의 나‘를 온전히 내 보일 수도 있겠구나.. 했단다.
지극히 영악하지 못해서 불쑥불쑥 나오는 ‘또 다른 나’를 이제는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이렇게 오랜 친구들 앞에서도 드러내고, 가끔은 친구 같은 우리 딸 앞에도 툭! 던져 내놓고는, “나, 이래도 괜찮아?” 하고 투정도 부리고 싶어 졌단다. ‘돌아가신 부모님 얘기, 다 커 버린 자식들’ 얘기가 태반이었지만 ‘건강수명’ 지켜가며 남은 시간, 잘~ 살아가자는 우리들 얘기도 빼놓지 않은 시간이어서 너무 좋았구나.
동백꽃이 흐드러질 이른 봄의 선운사로 가자는 다음 약속에 벌써부터 달뜬 마음이 돼, 볼이 발그레~ 해지는 건, 엄마의 ‘개인적인 나’는 여전히 스물의 그 시절을 살고 있기 때문일까? 하여 다가오지도 않은 내년 봄이, 엄마에겐 이미 찬란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