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앙상한 뼈대를 드러내고, 낙엽이 수북이 쌓인 가을날이면 항상 생각나는 정물이 하나 있단다. 아니 정물보다는 정물에 가까운 풍경 내지는 기억이라고 해야 맞을까? 오늘은 그 얘기의 한 조각을 왠지 들려주고 싶구나. 엄마가 고등학생일 때 각 학교엔 ‘문학 동인 회’ 란 게 있었단다. 언젠가 네게 얘기한 적이 있었을 거야! 그렇게 각 학교에 문학 동인 활동을 하는 아이들이 다시 모여 ‘연합 서클(그때는 동아리가 아닌 서클이라 불렀단다.)을 만들었고.. 이 맘 때부터 시작해, 한 해 동안 자신들이 써 오던 시를 모아 시화전을 펼치곤 했지.
치기 어린 시들의 난장인 그 시화전엔 이 바닥에서 글 좀 쓴다는 학생들이 마치 승냥이처럼 몰려들어서는 ‘뭐 좀 뜯어먹을 게 없나?’ 하고는 눈을 번뜩이며 돌아다녔단다. 몹시도 수줍고 낯을 가리던 성격인 엄마는, 기존의 거대 서클이 아닌, 신생 서클의 멤버로 자칭 타칭, 메이저인 그들이 뱉어내는 신랄하고도 정제되지 않은 시평에 마음을 다치곤 했단다. 누구보다 시를 사랑하고, 시인이 되고 싶었던 열일곱 무렵의 소녀가 감당해내기 힘들었던 그 무자비한 독설의 그늘은, 가끔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생각을 품게도 만들었었지.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 잔혹한 시평 대신 붙여 놓은, 노트를 북~찢어 써 내려간 절절한 시 구절이 엄마의 맘을 위로해 주었단다.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이었지. 뒷부분인데 잠시 들어볼래?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천재라 불리던 박인환 시인이 한 술집에서 즉흥적으로 써 내려갔다던 삶과 사랑, 그리고 죽음에 관한 짧은 서사가 새초롬하기 그지없던 늦가을 시화전에서 숱한 상처를 입고 울고 있던 엄마의 맘을 그렇게 위로해 주었구나! 이 시의 전편 뒤엔 “누가 뭐래도 당신의 시는 시간을 넘어 영원할 것입니다. “라는 수줍은 고백이 꽃처럼 달려 있었지. 당시 허무주의를 표방한 시를 쓰고자 했던 엄마의 마음을 꿰뚫어 본, 그 현명한 독자는 누구였을까? 때론 수천, 수만 마디의 말보다 한 편의 시가 더 큰 위로로 다가온다는 걸, 우리 딸도 알았으면 좋겠구나.
시가 가진 가장 큰 미덕을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아 아쉬울 때가 종종 있단다. 아무튼 다시 늦가을,
모든 생물들이 고요히 침잠할 준비를 하는 와중에 낙엽 쌓인 어느 거리의 벤치에서 이 시 ‘세월이 가면’을
멜로디에 얹어 곱게 옮겨 불렀던 박인희의 노래를 반복해서 들어도 좋겠다 싶구나. 모든 것이 명멸해도 우리 가슴에 남아 있을 지난 시간들의 흔적을 짚어가면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