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다니는 산책길, 줄지어 선 무성한 단풍나무들 중, 유독 밑동이 굵은 하나에 살짝 물이 들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연초록잎들이었는데, 자연이 시간의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일은 인간의 호흡과는 확연히 다른 것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벌써 처서다.
여름도 아닌, 그렇다고 완연한 가을은 더욱 아닌, 애매해서 어쩐지 더 아름답고 신나는 절기, 처서! 살랑바람 부는 가을인가 싶어 해바라기를 하러 나섰다 무자비하게 뜨거운 볕에 깜짝 놀라거나,끝난 줄 알았던 장마의 재출현에
어리둥절해지기도 한다. 아직은 여름 인가하여 실망할라 치면, 땅거미를 길게 몰고 가는 풀벌레 소리는 적요하게 온몸에 감겨온다. 이렇게 '처서 즈음'은 여름과 가을이 힘겨루기를 하며 지나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토록 강, 강, 강으로만 기세가 등등하던 매미소리가 강, 약, 약으로 잦아들며, 오랜 기다림으로 계절의 등 뒤에 잠복해 있던 귀뚜라미에게 바통을 넘겨주는 것도 하루가 다르게 느껴진다. 하여미리 받아보는 가을, 절기 '처서'는 마음껏 두 계절을동시에 느껴보라, 자연이 가불 해준 선물 같다.
순진무구했던 시절, 처서가 지나면 모기 입도 비뚤어진다길래, 모기장에 붙어 지근거리에서 모기를 관찰했던 적이 있다. 입이 비뚤어진 모기가 '설마 물까?' 란 혼자만의생각은, 혹시라도 누가 알까 무서운 참으로 얼빠진 생각이었으나, 그 또한 계절을 느끼려는 열린 맘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싶다.
성급한 단풍잎 몇은 벌써 물이 들고
처서를 그려낸 여러 가지 문장들이 있지만 그중의 白眉는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 일 것이다. 얼마나 근사한 묘사인가. 문장에 쓰인 스물일곱 글자를 하나하나 따라가며 가만히 상념에 스며들어 보니, 시각뿐만이 아니라 청각적으로도 대단히 낭만적인 절기가 바로 이 처서인가 싶기도 하다.
어쩌면 이 하루는 여름 내내 무더위에 젖고 따가운 볕에 그을린 몸과 맘말끔히 씻고, 다가올 가을을 신성하게 맞아보라는 신의 자애로운 '처사'가 아닐까.그러니 흠뻑 즐기자. 또 한 번의 '처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