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어지러운 구비를 하나씩 돌아 넘을 때마다, 그 구비에 숨어 있는 높디높은 산을 건너고, 시푸르고 깊은 강물과 가시밭길과 폭풍우 속을 헤쳐 나올 때마다 생각나는 노래가 하나 있다. 바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다. 김광석과 동년배라서, 또 동시대를 비슷한 성정을 품고 살았다 자부하기에 이 노래 '서른 즈음에'는 각별하다.
해서, 김광석이 콘서트 때마다 들려주던 노래에 얽힌 본인의 이야기가 마치 내 이야기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래서일까, 나의 '서른 즈음'을 둘도 없이 적확한 노랫말로 명시하고 풀어냈기에 이 노래가 흘러나올 때면 '서른 즈음'의 언저리를 헤매는 나의 초상을 만나곤 한다.
그런데 왜 나는 '마흔 즈음'과 '쉰 즈음'을 지나 어언 '예순 즈음'에 가까워온 지금까지도 시간의 속살을 어루만지며 그때, 그 밀기울 같이 들떴던 방황의 순간들을 다시 떠올리곤 하는 것일까?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 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 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김광석/서른 즈음에
서른이라는 나이처럼 심장을 뭉근히 데우며 그 온도를 오래도록 유지하는 나이가 또 있을까? 스물아홉도 아닌 서른 하나도 아닌 딱 서른, 그 서른 말이다. 물론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듣다 보면 스물아홉도 서른 하나도 포용하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적어도 내게 이 '서른 즈음에'는 '서른'이라는 나이를 특정하며 스며든다.
그래서 종종 아리고, 많이도 아프다.
상처인 줄 모르고 있다가 언뜻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인생을 각성했던 나이, 그즈음이 내 '서른'였기 때문이다. 스물을 살 때는 마치 먼먼 어딘가에 서른이 있어 서른에 다다르면 인생이 끝날 거 같기도 했다. 처음 이 노래 '서른 즈음에'를 들었을 때, '서른'엔 인생의 대부분이 완성돼, 더 이상 기대와 희망 같은 건 품지도 못하고 일어나지도 않으리라 단정했었고. 매일 이별하며 살아가는 정해진 삶 속에서 계절은 그렇게 다시 돌아오고 자연은 거대한 순환을 통해 우리에게 예정한대로의 행로를 걷도록 인도한다 싶어, 갑자기 인생이 시시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나의 '서른' 은 '스물'에 그토록 가슴 졸이며 기대하던 삶을 보여주지도 않았으며, 그저 어제와 같은 오늘, 혹은 그려낼 수 있거나 예측 가능한 내일을 개봉 예정작처럼 슬쩍슬쩍 펼쳐내고는 했다. 그런 날들이 차곡차곡 모아지더니 시간은 견고하지 않은 퇴적층을 쌓아, 언제고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을 '인생의 성'을 위태롭게 조형해 가고 있었다. 서른엔 결혼을 했고, 그다음 해엔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고, 눈 떠보니 직업을 잠시 잃은 사람이 돼 있었다. 그렇게 나의 '서른 즈음에'는 기억 속에 채울 수 있는 그 무엇을 만들지도 못한 채, 빠른 유속을 따라 흘러가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이내 '청춘'이라는 아름다운 섬에서 조금씩 멀어져 가는가 싶더니 인적도 없는 무인도의 해변에 표류하거나, 진공의 우주공간에 갇힌 듯 어리둥절한 느낌. '서른 즈음에'를 처음 들었을 때, 목 놓아 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으면서, 이 노래를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들으며 얼마나 꺼이꺼이 울었던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청춘이 아쉬워서라기 보다, 매일을 또렷한 기대와 빛나는 긍정으로 살아내던 시간에 대한 회한이 폭탄으로 심장에 뚝, 떨어져 도무지 숨을 쉴 수가 없던 터였다. 이렇게 '서른 즈음'을 보내고 나면 내 인생은 윤기를 다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지독한 상념이, 자꾸 바닥으로 바닥으로만 나를 끌어내렸으므로.
그, 러, 나. '마흔 즈음' 혹은 '쉰 즈음'에 다시 들은 '서른 즈음에'는 가사가 전하는 밀도만 다를 뿐, 그 의미는 동일하게 다가왔다. 어제를 보내고 다시 오늘을 맞는 삶, 점점 멀어져 가는 오늘 하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공허해지는 마음, 별반 기대는 없다지만 내일이 있기에 잊어야 할 것들을 조금씩 잊어가는 자세. 서른에 느꼈던 처음과 끝을 알 수 없이 엉긴 감정, 그대로였다.
마흔에는 마흔대로, 또 쉰에는 쉰대로 인생은 녹록지 않은 표정을 하고 우리에게 얼굴을 들이밀고는 한다. 가끔은 그 얼굴이 징그럽고 싫어서 눈을 감아버릴 때도 많았다. 하지만 '매일 이별하는 삶' 아니던가. 매일 이별하고, 다시 만나고 가끔은 기억하지도 못한 채 잊혀도 가는 그런 게 삶이리라.
절망과 우울이 출처를 알 수 없는 어딘가로부터 매일 배달되던 때, 그 '서른 즈음'에, 김광석이 예의 달관한 인생사와 함께 들려주던 '서른 즈음에'가 있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비록 따라 부를라치면 시원하게 터져 나오지 못하고 목울대에 걸려 맴돌 뿐이었어도.
시간이 흐를수록 형형했던 눈빛은 녹슬어가도, '서른 즈음에'를 듣는 날이면 매일을 어떤 것들과 멀어져 가며 다가올 새로운 날들을 바라보는 나, 변한 듯 변하지 않은 얼굴로 저무는 하루를 응시하는 나, 그 '나'가 아직 건재해 고마운 일이다. '서른 즈음에'를 '정언명령'으로 툭 던져 놓고 혼자만 영원히 '서른 즈음'에 머물고 있는 김광석은,때로 야속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