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병원에는 계절이 없다.
에어컨 바람과 약 냄새가 섞인 공기 속에서는 봄도 여름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얀 천, 하얀 벽, 하얀 복도, 하얀 얼굴들.
그 속에서 나는 거의 매일, 어머니의 이름을 확인하듯 방문 앞 명패를 만지곤 했다.
“오늘은 좀 어떠세요.”
내가 물으면 어머니는 웃으셨다.
입술이 바짝 말라 있었지만, 그 웃음만큼은 여전히 젊은 시절의 모습 그대로였다.
의사는 매번 같은 말을 했다.
“이 상태가 오래 유지되면 좋겠네요.”
그 말은 늘 희망처럼 들렸지만, 실은 그 말 안에는 ‘더 좋아지긴 어렵다’는 뜻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런 말을 이해하면서도 매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복도 끝 자판기 앞에서 캔커피를 사 들고 창가 쪽으로 걸어가곤 했다.
그때마다 유리창 너머로 저녁 노을이 번졌다.
붉은 빛과 노란 빛이 뒤섞여, 마치 세상의 마지막 온기가 저기 모여 있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하얀 섬광이 병원 뒤편 산자락을 가르며 내리쳤다.
비는 오지 않았는데, 하늘이 갈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녀는 빛 속에 있었다.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었다. 불빛과도 같았고, 환영처럼 아스라했다.
처음엔 눈이 부셔서 착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녀의 빛이 눈꺼풀 속에 남아 있었다.
눈을 감으면, 어둠 속에서도 그 붉은 잔상이 깜빡였다.
며칠이 지나도록 그 이미지는 지워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상태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고 의사도 “이제 회복 단계에 들어섰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날 이후로 내 안의 시간이 조금 느려졌다.
불빛 하나에도 오래 머물렀고, 꺼져가는 등불을 쉽게 지나치지 못했다.
마치 그날의 섬광이 아직 내 그림자 속을 비추는 듯했다.
병원 뒤편에는 조용한 산책길이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듬성듬성 길을 비추고, 풀잎 위로 빛의 알갱이들이 떨어졌다.
나는 그 길을 따라 걸었다.
풀벌레 소리와 함께, 가로등 아래 나무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끝, 작은 바위 하나가 있었다.
그날 벼락이 내리쳤던 자리였다.
놀랍게도 그 바위 위에 장미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누가 심은 것도 아니고, 돌 틈을 뚫고 나온 듯했다.
그 순간, 뒤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빛이 참 따뜻하네요.”
나는 돌아보았다. 그녀였다.
붉은 옷을 입은 여인. 그날 하얀 섬광 속에서 본 그 얼굴이었다.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다가섰다.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이 빛을 보고 있었어요. 누군가를 비추는 일은, 늘 아름답잖아요.”
그녀의 말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그녀의 눈 속엔 어머니의 눈빛이 있었다.
어릴 적, 밤새 열이 나던 날 내 이마에 손을 얹고 “괜찮다”고 말하던 그 눈빛.
나는 그제야 알았다. 그녀가 누구를 닮았는지.
그날 이후 나는 매일 병원을 찾았다.
퇴근 후 어머니의 침대 곁에 앉아 이야기를 들려드렸다.
하루 동안의 일, 회사에서 있었던 사소한 모멸감들, 그리고 산책길에서 본 장미와 그 빛에 대하여.
어머니는 내 이야기를 들으며 종종 눈을 감곤 하셨다.
마치 내가 아닌, 그 붉은 빛 속의 여인과 대화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돌아오는 길, 나는 다시 산책로로 향했다.
바위 위의 장미는 여전히 피어 있었지만,그 주변에는 작은 전구 하나가 켜져 있었다.
누가 두고 간 건지 알 수 없었지만 하얀 불빛이 장미를 감싸고 있었다.
그날 이후, 그 장미는 사라졌다.
그리고 며칠 뒤, 어머니의 상태가 다시 악화되었다.
그 주말, 폭우가 쏟아졌다. 천둥소리가 병원 창문을 때렸다.
나는 병실 안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어머니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 순간, 불이 깜빡이며 꺼졌다.
순간적인 정전.
어둠 속에서, 나는 희미하게 누군가 내 손을 잡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창밖에서 번쩍, 빛이 일었다. 하얗고 뜨거운 빛이 병실을 가득 채웠다.
눈을 떴을 때,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에는 빛이 어른거렸다.
“괜찮아. 이젠 괜찮아졌어.”
그 한마디에,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며칠 후, 어머니는 스스로 일어나 앉았다.
의사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마치 한 번 꺼졌던 전등이 다시 켜진 것처럼 회복됐어요.”
그로부터 한 달 뒤,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오셨다.
병원의 차가운 조명 대신, 거실의 따뜻한 스탠드 불빛이 어머니의 얼굴을 비췄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드시고, TV 리모컨을 찾으며 웃으셨다.
그 웃음소리는 오래전 잃어버렸던 여름 저녁의 소리 같았다.
나는 그날 밤, 불을 모두 끄고 거실의 조명 하나만 켜두었다.
노란 불빛이 벽에 번졌다. 그 속에서 나는 장미의 잎맥 같은 빛의 무늬를 보았다.
그녀 ― 그날의 여인 ―
그 빛 속에서 미소 짓는 듯했다.
어머니는 요즘 내게 이런 말을 하신다.
“네가 매일 켜두는 저 불빛 덕분에 잠이 잘 온다.”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스탠드를 향해 손을 얹는다.
그 불빛은 이제 내게 단순한 조명이 아니다.
그건 어머니의 숨결이고, 어떤 날엔 나 자신이 꺼뜨리지 않으려 애쓰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