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희망이 혼재했던 세기말에 탄생한 이 집처럼
서울의 아파트 생각을 접고 곧바로 시골집 매매를 결심한 건 아니었다. 되도록 전세나 연세, 월세로 나온 공간을 구해서 시골생활에 가벼운 연착륙을 하고 싶었다. 시골에는 빈집이 많다니까 어쩌면 원하는 공간을 손쉽고도(?) 저렴한 조건으로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지금 생각하면 코웃음이 나오는 헛된 기대감에 부풀어있었다.
알고 보면 부동산은 수요와 공급이 아주 명확한 시장이다. 시골에 빈집이 많다는 사실이 자칫 공급이 많다는 뜻으로 들릴 수 있지만, 오히려 반대이다. 우리나라의 시골 대다수는 인구소멸 위기를 당면하고 있기에, 건설사는 시골에 새 아파트(혹은 빌라)를 짓지 않는다. 그와 동시에 시골의 빈집은 장기간 방치되면서 점차 사람이 살 수 없는 주거환경으로 변해간다. 헌 집은 늘고 새 집은 없으니 부동산 매물의 선택지는 좁아진다. 그럼에도 시골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살 만한 집을 필요로 하고 일정한 수요는 당분간 유지된다. 그래서 월세는 비싸지고 거주의 퀄리티는 떨어지고, 결국 사람들은 부동산 문제 때문에 도시로 떠나게 된다.
3개월 간 시골집 임장을 하면서 각양각색의 집과 땅을 보고 다녔다. 사방이 축사로 둘러싸여 소가 사는 나라에 내가 잘못 들어온 건가? 싶은 곳도 있었고, 럭셔리하게 지어진 2층집이 마음에 쏙 들었지만, 집까지 이어지는 도로가 없어서 포기한 곳도 있었다. (그 집을 들어가려면 마을 입구에 차를 세워두고 걸어 다녀야 한다.) 지인의 소개로 보게 된 땅은 우여곡절 끝에 계약서 작성까지 마쳤지만, 땅값을 알게 되자 배가 아파진 그 지인이 분란을 일으켜서 계약을 파토내기도 했다. 하루하루 인류애가 소멸하는 나날이자, 3대가 덕을 쌓아야 땅을 산다는 말을 실감하는 나날이었다.
심신이 너덜너덜해져 서울로 돌아가겠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을 때, 운명처럼 만난 우리들의 세기말하우스. 1999년에 지어졌다는 집은, 전 주인 할머니가 당뇨로 갑작스레 돌아가시면서 빈 집이 되었다. 자식들이 유품정리를 포기해 할머니의 옷과 신발, 사진 등 온갖 살림살이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여기 살던 할머니는 병원에서 죽었어. 이 집에서 죽은 거 아니니까 괜찮아! 무서운 집 아니야”
서울에서 내려와 집을 구한다는 젊은 손님을 안심시키려고 한 말이겠지만 진짜로 그랬다. 초등학생의 흔한 여름방학 코스인 시골 외가댁에 온 기분. 그런 표정을 눈치챘는지, 이 집은 함께 살던 할아버지가 직접 지은 벽돌집이라 아주 튼튼하다고, 자기가 살려고 지은 집이니까 얼마나 좋게 만들었겠냐는 설명이 이어졌다.
그리고 머지않은 날, 나의 첫 부동산 거래가 성사되었다.
열쇠를 넘겨받고 자식들이 포기한 유품정리를 대신했다. 차곡차곡 쌓아놓은 새 수건과 포장도 뜯지 않은 새 반찬통. 가지런히 정리된 포대자루와 농기구들. 살림들을 꺼내고 정리하고 처분하며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할머니를 내내 떠올렸다. 리모델링 공사를 위해 뜯어낸 문틀, 문지방 밑으로 드러난 벽돌, 그리고 영원히 뽑히지 않을 것 같은 못을 빼낼 때는 건축주인 할아버지의 깐깐한 성격을 짐작하기도 했다.
만약 사람이 죽어서 바로 사라지지 않는다면.
두 분이 어딘가에서 우리를 볼 수 있다면. 서울에서 시골로 내려와 흙먼지 뒤집어쓰며 삽질하는 우리를 보고 있다면 과연 무슨 생각을 하실까, 라며 이런저런 상상도 해보았다.
모르는 사람이 살림에 손을 대서 속상해하실까?
집이 예전보다 깨끗하고 예뻐졌다고 좋아하실까?
어리숙한 우리에게 뭐든 알려주고 싶어 하지 않으셨을까?
마음대로 꾸며낸 생각 속에서 우리는 온기를 되찾았다. 불안과 희망이 혼재했던 세기말에 탄생한 이 집처럼, 우리의 앞날도 휘청이며 중심을 찾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