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박 시 네 말이 다 맞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한다. 새벽에 눈을 뜨면서 자기 전까지만 약 평균 200번이 넘는 선택을 한다. 오늘 아침도 5:45분에 일어나서 '아, 십 분만 더 잘까, 오늘은 조금 늦게 갈까?' 내적갈등 하면서 하나의 선택을 시작한 셈이다.
현대사회는 이처럼 무수한 이해관계 속에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작게는 오늘 먹을 저녁 메뉴가 바뀌거나, 크게는 순간의 선택으로 인생 전체가 바뀌기도 한다.
다양성과 포용이 중시되는 사회에서 예전에는 강요 속에 당연시 여겨졌던 것들이 선택으로 바뀐 것도 많다. 가령, 예전에는 중학교를 졸업하면 당연히 고등학교를 진학해야 하고, 또다시 3년간 공부해 대학교를 가야 했다면 지금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본인이 원하는) 일을 해도 사회적 핍박을 받거나 힐난을 받는 경우는 과거보다 현저히 줄었다. 말 그대로 각자의 주체적인 선택 속 다양한 삶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10대가 지나 20대, 30대로 들어서 강요가 선택이 된 대표적인 건 결혼과 출산이다. 30대가 넘어 결혼을 안 한다고 해서 당연히 해야 하는 걸 안 한다고 뭐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한 사람이 안 한 사람보다 훨씬 적어 사회적 분위기가 그런 말을 할 분위기 자체가 안된다.
이런 상황 속 하나의 부작용이라고 하면 이 다양한 선택이 타인의 존중 없이 무관심으로 변질될 때다. 진정으로 우러나지 않는 맹목적 배려와 무관심은 사회를 멍들게 한다. 이는 자연스레 서로에 대한 갈등을 낳고 그 갈등이 점점 곪아 혐오로 번진다.
결혼과 출산을 예로 들어보자. 결혼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처음엔 선택이었으나, 남자는 여자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남자는 군대도 갔다 오고, 사회생활도 늦게 시작하는데 정작 결혼할 때가 되면 여자는 3천만 원, 5천만 원 들고 온다며 성별 그 자체에 일반화를 시켜 비난을 조장한다. 반대로 여자는 이를 남자에게 책임을 문다. 남자들이 능력도 없으면서 외모만 밝힌다며 군대가 벼슬이라며 서로를 물고 뜯는다.
어른들은 요즘 청년들이 노력을 안 해서 취업도 못한다고, 능력도 안되면서 눈만 높다고 얘기한다. 반대로 청년들은 그 시절은 서류만 넣어도 다 합격시켜 주는 시절이었고 눈 낮춰서 중소기업도 쓰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며 반문한다. 우리나라처럼 남녀갈등, 세대갈등이 심한 곳도 사실 드물다. 이외에도 기득권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정치, 종교, 지역(전라도/경상도) 수없이 많은 갈등 속에 우리는 젖어간다.
출산율이 0.5명으로 추락한 지금, 출산과 같이 이 갈등이 사회적으로 부정적으로 영향을 끼칠 때 정부가 보통 나서는데 책상 앞에서 만들어진 현실과 동떨어진 탁상공론은 일반 서민들이 느끼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이 답답한 현실 속에서 갈등을 조장하지 않고 부정적인 결말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우린 그럼 어떤 편에서, 어떤 선택을 해 나가야 할까.
나는 내가 한 선택에 확신을 갖는 것이 첫 번째라고 본다. 사람은 원래 이기적이고 간사하다. 이는 평상시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본인이 위기에 처하면 온전히 드러난다. 내 것이 부족하거나 아니다 싶으면 상대방을 깎아내려 나를 높임으로써 이를 정당화시키려고 하는 거다. 그리고는 상대방은 아예 고려하지 않은 채 이를 스스로 위안 삼는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현상은 내 선택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생기는 것. 이런 사람이 많기 때문에 자연스레 사회가 팍팍해지고, 서로에 대한 불신이 더 쌓여 무한 악순환을 낳는다.
우리는 그 시간에 그냥 내 거 하나 더 한다는 마인드가 필요하다. 어차피 누군가를 깎아내리고 헐뜯는 사람은실제로 그 당사자를 만나면 대면으로 절대 이 말 못 한다. 다 뒤에서 혹은 키보드워리어처럼 인터넷상으로 떠들 뿐이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게 깎아내리는 사람이든, 그걸 당하는 사람이든 그 감정자체는 충동적인 그 찰나의 순간일 뿐이다. 어차피 사람들은 본인이 생각하는 것만큼 본인에게 관심이 딱히 없으므로, 비난을 듣는 사람도 상처 없이 바로 잊어버리면 그뿐이다.
다음 어쩌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반박 시 네 말이 맞다‘라고 인정해 버리는 거다. MZ세대 사이에서 이 말이 요즘 유행이다. 이 문장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먼저 ‘상대방이 어떤 얘기를 하든 나는 그걸 듣지 않고 무시하겠다’라는 해석이 있고, 두 번째로는 ‘네가 말한 것도 사정이 있을 거니 인정하고 받아들이겠다’는 뜻이 있다.
우리는 이 두 번째 의미에 집중해야 한다. 모두 각자만의 사정이 있다. 몇십 년째 늘 예능 최정상을 지키는 국민 MC 유재석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정말 놀랍겠지만 100% 선량한 사람도, 부처님도, 예수님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왜 싫어하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그 사람도 그 사람만의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실제로 그렇다. 뭔가 본인만의 이유가 있다.
유튜브에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클래식과, 빗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한창 잠이 안 올 때 편안한 수면을 위해 그렇게 며칠을 켜 놓은 채 잠에 들곤 했다. 근데 놀라운것이 그 자연의 소리에도 악성댓글을 다는 사람이 있었다. 소리가 거슬린다니, 시끄럽다니•••물론 극소수지만 결과론적으로만 보자면 결국 그 사람도 그 사람만의 빗소리가 듣기 싫은 사정이 있는 것이다. 빗소리에 대한 끔찍한 경험이라던지, 트라우마라던지•••
‘반박 시 네 말이 맞다’라는 말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생각과 대립되는 상황이 필요하다. 내 주장과 정반대의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 대립되는 상황에서 내가 가진 주장이 상대방에게 설득되지 않을때 이 말을 결국 사용한다. 근데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자. 내 말은 과연 맞을까? 어떤 근거로 내 말이 맞는 걸까. 상대방은 그렇게 아니라고 반박하는데. 그냥 서로 존중해 주면서 너 말도 맞다고 단정 지으면 된다.
그리고 상대방이 그런 말을 했다면 아무것도 없이 갑자기 튀어나온 말은 아닐 것이다. 꿈을 꿀 때에도 내가 관심 있고 늘 생각하는 것과 관련된 꿈만 꾸듯, 그 생각도 본인의 온전한 생각과 오래된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가 주로 하는 생각이나 감정이 아닐지라도 누군가가 어떤 말을 했다는 것은 오랫동안 파묻혀온 본인만의 이야기를 하는 거다. 우리는 그래서 네 말이 맞다고 얘기함으로써 상대방의 존재자체를 인정해 주는 거다. 이는 관대하게 상대를 배려하는 존중의 단어다.
이게 일상 속에서 생활화된다면 인생에서 더 현명한 선택과, 그 선택들로 하여금 더 서로를 끌어안는 따듯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