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규모의 경제
멕시코에서 스페인어를 처음 배울 때의 일이다.
수업시간에 각자 본인의 나라의 수도에 대해 표현하는시간을 가졌다. 당시 내가 아는 단어 내에서 이 서울을 표현하기에 참 서툴렀던 기억이 난다. 나는 대답했다.
“서울은 화려하고, 이쁘고, 빠르고, 멋있고, 크고, 넓고, 높고, 많고, 치열하며, 붐비고...”
실제의 서울은 어떤가. 모두 맞는 말이다. 언론과 매스컴에서는 서울이 가지는 상징성을 알리듯 서울에서 일어난 수많은 일들을 가장 먼저 아침에 보도한다. 정치라던가, 스포츠라던가, 날씨라던가, 교통체증 모두.
그렇게 서울은 한국인의 눈치 보고 비교하는 삶 속에서 성공이라는 프레임을 뜻하는 고유명사가 됐다.
자,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서울은 다 야망 있고, 소득 수준도 높아 대체적으로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근데 실상은 다르다. 경제적으로 어려울수록 어쩔 수 없이 더 서울을 좇는다. 한번 서울을 빠져나오면 다시 가지 못할 가능성이 높기에 어떻게든 빠져나오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왜 가난할수록 서울에 오게 되는가. 서울에는 몸을 누울 원룸값만 월 70만 원 가까이 되는데? 그걸 무릅쓰고 왜 이곳 서울에서 천만명이 넘게 모여 아등바등 사는가를 생각해 보면 꽤 재미있는 결론이 나온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한 사람의 인생에 가장 바탕이 되는 것은 바로 ‘의식주’다. 입을 것, 먹을 것, 지낼 곳 이 세 가지가 꼭 충족되어야만이 생존의 욕구를 넘어 다른 생각이란 걸 할 수 있다. 드라마를 본다던지, 책을읽는다던지, 미래의 최소한의 목표를 세운다던지. 그럼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에 의식주가 제대로 안 갖춰져 있는 곳이 있을까? 단언컨대 없다. 최소한의 돈, 그리고 본인의 돈을 벌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이를 갖추면서 본인의 자아실현을 할 수 있다. 시골이나 지방 어디서든.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미스매치를 발견하게 된다.
의식주의 ‘의’와 '식'을 보자. 입고 먹는다는 건 단순히 내가 오늘 저녁 무엇을 먹겠다, 주말에 쇼핑몰에 가 옷을 고르겠다는 것이 아니라, 입을 것, 먹고 싶은 걸 살 돈을 벌 수 있냐를 말한다. 근데 우리나라는 서울에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어 양질의 일자리 자체도 서울에 포진돼 있다. 울산이나 여수, 중화학단지가 있는 몇몇의 도시를 제외하면 사실상 거의 대다수의 일자리는 지방과 임금 부분에서 큰 격차를 띤다. 그러면 결론은 본인의 역량을 높여 서울에 와야만 매달 받는 돈의 액수가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럼 더 맛있는 걸 먹으면서 삶의 질이 달라질 수 있겠지. 아, 물론 지방에서 전문직이나 본인의 역량으로 큰돈을 벌고 있는 이들은제외다. '평범한 직장인'을 가정으로 한다.
그런데 반대로 '주'의 입장에서 보면 정반대다. 서울의 평균 아파트값 평균은 10억이다. 이것도 24평(59 제곱) 얘기다. 어제자 뉴스는 국민평수 84 제곱은 평균 12억이라고 한다. 7~8년 전 대비 거의 2배 넘게 올랐다고 보면 된다. 이게 얼마나 큰돈인지 가늠이 되는가? 예를 들어, 한 달에 평범한 직장인이 받을 수 있는 월급을 아주 넉넉하게 세후 300만 원이라고 잡았다. 100만 원만 쓰고 200만 원을 적금 든다고 했을 때 1억을 만들기 위해서 5년 남짓이 걸린다. 근데 10억이라니. 인생의 2/3를 서울의 아파트 한채 사는데 올인해야 한다. 그 사이 이 평범한 남성은 연애도 해야 하고, 여행도 한 번씩은 가야 하고, 취업준비도 해야 하고, 외식도한 번씩 해야 하고, 취미생활도 있을 것이고, 부모님께 용돈도 드려야 하고, 결혼도 해야 하고, 자녀도 출산해야 하는데 어떻게 이 집을 마련할 수 있을까. 이것도 넉넉히 잡은 것이다. 사회초년생이 세후 300만 원을 받을 수 있는 직장이 과연 대한민국에 몇이나 될까?
10%도 안된다고 장담한다. 10억짜리 아파트 한 채가 꼭 아니더라도 서울 외곽 원룸만 60~70만 원인데.
일자리를 못 구해 알바라도 하려고 치면 진짜 손에 남는 돈은 없다고 보면 된다. 이 친구는 딱 하나, '더 나은 삶' 즉, 이를 쉬운 말로 풀면 양질의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서울로 온다. 그렇게 해서 매일 아침 출근길 지옥철을 견디고, 편의점 도시락 사 먹고, 연애나 여행을 포기한다. 서울에서의 그 작은 희망 하나 지키기 위해서.
부모의 도움 1도 없이는 의식주 셋 다 가지기는 벅찬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한 가지 선택을 내려야 한다.
그래서! 서울로 온다. 조금 더 내가 자아실현에 대한 결핍이 있거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경우에는 더 큰 꿈을 찾고자 서울행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집값도 싸고, 서울에 본사를 둔 대기업은 다니지 못할지언정 적당히 벌고, 집값이 싼 만큼 적당히 안분지족의 삶을 누리는 삶이 만족스러운 이들은 오히려 서울이 싫다고, 지방을 고집하게 된다. 그리고 점점 더 그들의 삶은 고착화되고 각자가 처한 위치와 상황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서울에 사는 사람과 지방러들은 서로 간에 보이지 않는 철옹성 같은 단단한 벽이 생긴다. 강남, 서초 사는 화려한 부자의 삶 뒤편에는 처절하게 현생을 살아가는 이들이 서울을 메꾸고 있다는 거다. 앞으로 십 년, 이십 년 뒤에는 장담컨대 서울 내에서도 최상급지 강남이나 서초는 그들만의 자산을 지키고자 장벽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 다른 이면에는 서울에서 본인의 행동반경을 넓히려는 이유도 있다. 일단 사람은 밖에 나가서 사회생활을 해야만 본인 스스로가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 육아에 지친 경단녀가 사회에서 자신감을 잃거나, 우울증에 걸리는 이유도 이와 동일하다. 그럼 밖에 나가서 무언가를 할 때에 지방 소도시에 살고 있다고 해보자.
내가 공부를 하든, 친구를 만나든, 일을 하든, 면접을 보든 돈이 여의치 않아 맨날 대중교통만 타고 다닌다. 근데 지방은 대중교통이 배차간격이 매우 길고, 노선이 한정적이기에 행동반경이 특정 영역 내 제한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30분 차로 갈 것도 대중교통은 돌고 돌아 한 시간이 넘게 걸리고 삶의 질이 많이 떨어지거든. 근데 서울은 차가 아예 필요 없을 정도로 거미줄처럼 대중교통이 활성화돼 있기 때문에 내가 돈이 없어 자동차를 사지 않아도 이 모든 생활반경을 누릴 수 있다. 가진 자산대비 가성비가 굉장히 뛰어나다. 공유경제의 가장 큰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청년들은 서울교통공사에 매월 오만 오천 원만 지불한다면, 우리 모두 이 거대한 양질의 시스템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셈이 된다. 누군가를 만날 때도, 행사가 있을 때도, 새로운 장소에서 누군가와 연대를 맺는 데 꽤나 효율적이다. 아 물론 이 거대한 시스템을 N분의 1로 나누어 내지는 않는다. 65세 이상은 대중교통이 무료이니 이 세금을 공짜로 취하는 소수 계층도 존재하지만 더 거시적으로 보면 그렇다. 지하철, 버스 대중교통이 아니더라도 도서관, 공원, 교육 등 모든 공공서비스가 포함된다.
규모의 경제. 생산규모의 확대에 따라 생산물 한 단위당 비용이 삭감되는 것을 말한다. 자, 그러면 서울에 있으면 전체 예산 자체도 많겠지. 더 많은 사람들이 복지정책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서울 청년수당이라고 해서 미취업청년들에게 매월 50만 원을 지급하는 제도를 보자. 경기도 청년면접수당을 보자. 실제로 청년수당을 6개월 수급해 본 내 입장에서는 취업준비를 하거나 미래를 계획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물론 유흥이나 오락 등 취지와 상반된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이런 부작용은 그 어떤 똑똑한 정치인이 낸들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서울경기권은 이런 혜택을 할 수 있는 규모의 명분이 있는 것이 인구가 2천만 가까이 되거든. 특정 계층을 위한 정책을 편다고 했을 때 시골이나 지방소도시와 같이 그 계층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면 이는 당연히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다.
일단 사람이 많으면 이런 공공적 혜택은 사실 부가적인 가치고, 우리는 ‘기회’ 측면을 눈여겨봐야 한다.
예를 들어 자영업자가 있다고 하자. 고깃집을 한다. 근데 일 년 뒤 손님이 급감해 고깃집이 망하기 일보직전이다. 그래도 지방보다 서울에서는 이 자영업자가 다시 일어날 확률이 훨씬 높다. 다시 맛있는 고기 숙성법을 개발해 다른 곳에 차려도 트렌드나 약간의 운만 따라준다면 충분히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왜? 대체 왜? 소비자 자체가 많으니까. 소극장이 망해도, 영화관이 통째로 문을 닫아도 마찬가지. 그게 바로 기회의 일종이다.
일단 내가 어떤 의미 있는 걸 생각하고 있다면 실행을 해야 삶이 바뀐다. 공부나 투자나, 교육이나, 한낱 작은 오프라인 취미 모임이라도 일단 뭔가를 실행하는 데 있어 그만큼 수도가 가져다주는 혜택이 크다는 거다. 이 좁디좁은 소국에서는 더더욱.
그런데 서울은 도저히 물가나, 집세나 모든 게 비싸 살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맞다. 저축을 할 수 없다는 말은 미래를 당겨 쓰고 있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미래의 행복을 지금 행복하자고 당겨 쓰는 꼴.
그래서 미래는 높은 확률로 불행하다. 이들에게는 당연히 서울에 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 고통도 내가 견딜 수 있고, 미래에 더 나은 모습이 기대될 때야만이 가치가 있거든. 존중한다.
자,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 선택지는 빠르면빠를수록 좋다. 복리 같은 개념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때만이 누릴 수 있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으니.
누군가는 말한다. 자기 객관화를 해야 한다고. 본인이 서울에서 이루고 싶은 간절한 꿈이 있고,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면 그 용기로 비싼 학비와 집세, 생활비를 무릅쓰고 가는 거라고. 나는 절대 아니라 본다. 지방에서 성공한 모든 사람들을 부정하는 논리다. 본인이 탁월한 뭔가가 없다면 그럼 지방에 짜져있어야 하나? 아니다. 이건 그냥 본인이 선택하는 문제다. 그 선택의 기준이 유희에 있든, 꿈에 있든, 그냥 본인이 정하면 된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어떤 선택을 하든 '주'와 '식'의 미스매치가 해결되지 않는 한 저출산 고령화 같은 사회문제는 짧은 시간 내에 해결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