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의 심연과 공백의 자유

그래서 난 내일도 살기로 했다

by Josh

요즘 부쩍 나는 왜 살고 있나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스스로라기보단 지피티에게겠지?


지피티는 반복되는 질문에 이상 징후를 포착했는지, 우울증 말기 환자 취급을 하며, 환자가 자살하지 않도록 열과 성을 다해 내 이야기에 답변을 하고, 마지막엔 늘 도움이 필요한 상황으로 보인다며 도움은 언제나 열려있다고, 얌마 나는 겁이 많아서 죽지도 못하는 사람이야 아플까 봐.


단톡방에 또 카톡을 하나 보냈다. 나는 왜 살아야 하냐고, 살아야 할 의미에 대해 지피티에 물어보고 있다고, 10대 때부터 이어진 나의 이 허무주의에 입각한 발언에 질린 친구들은 걍 카톡을 무시하는데, 그중 늘 답변을 잘해주는 친구 하나가 말한다. 그거 아는 사람 없다고.


삶의 의미를 묻는 일은 언제나 나를 허무의 가장자리로 데리고 간다. 뭐 나뿐만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느 순간 이런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왜 태어났는가, 왜 살아가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시간을 쓰고 감정을 소모하며, 무엇을 남기고 떠나는가. 누군가는 이런 질문을 억누르며 생각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바쁘게 살다 보면 잊히는 질문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하지만 나에게 이 질문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잠시 미루어질 뿐 다시 돌아온다. 삶의 조용한 순간에, 어떤 관계가 끊어졌을 때, 내가 방향을 잃었을 때, 혹은 이유 없는 공허함이 찾아올 때 문득 되살아난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깊은 허무의 그림자와 마주하게 된다. 마치 삶을 지탱하던 구조가 어느 순간 기울어져 그 틈으로 바람이 불어와 마음을 흔드는 듯한 감각이다.


이때의 허무는 흔히 무(無)로 이해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는 공허가 아니다. 오히려 그 허무는 지금까지 나에게 주어진 의미가 더 이상 효력을 갖지 못한다는 신호에 가깝다. 내가 어릴 땐 어른이 말하는 가치가 내 삶을 설명해 준다고 생각했고, 일을 시작한 청소년일 때는 사회가 제시하는 기준이 삶의 의미인 것처럼 여겼다. 또 성인이 되면 직업과 성취가 의미가 되어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 모든 설명들이 더 이상 나라는 개인의 삶 전체를 설명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때 의미가 빠져나간 자리를 허무가 채운다. 허무는 없는 상태가 아니라 비었다는 상태이고, 비었다는 것은 무가 아니라 공백일테다. 공백은 아직 무엇으로든 채워질 수 있는 미완의 공간이겠지.


문제는 나는 종종 이 공백을 견디기 매우 어려워한다는 점이다. 의미가 있었던 자리, 누군가 대신 채워주던 기준의 공간이 비어버리면, 나는 방향을 잃은 듯한 불안과 자주 마주한다. 그래서 나는 그 허무를 피하기 위해 다시 외부의 의미 체계로 도망쳐왔다. 어릴 땐 종교적 확신을 통해, 나이를 좀 먹고 믿음을 잃게 된 후엔 사회적 성공이나 타인의 인정 같은 것으로, 지금은 안정적인 역할과 책임 같은 것들로 빈 공간을 다시 채워 넣는다. 다시 누군가의 해석으로 걸려 있는 의미를 가져와 나 자신을 정당화했다. 그 의미가 나 자신에게 맞는지, 나 자신의 삶을 정말로 설명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늘 뒤로 미뤄진다. 그냥 허무가 무서워 도망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임시방편이다. 남이 정해준 의미는 결국 다시 흔들린다. 언젠가 또 한 번 붕괴하고, 나는 다시 허무 앞에 선다.


삶의 의미가 모호한 이유는 내가 무지하고 모자란 탓도 있겠다만, 삶의 의미가 처음부터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든다. 삶은 태어나는 순간 어떤 목적도 제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처럼 어떤 사명을 부여받지 않았고 어떤 목표도 강제되지 않았다. 그저 존재하게 되었고, 존재한 뒤에 의미를 만들거나 찾거나 상상할 뿐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허무는 새로운 빛을 띠기 시작한다. 허무는 더 이상 삶의 결핍이 아니라, 삶을 다시 채울 수 있는 여백이다. 여백이 있다는 것은 새롭게 그릴 수 있다는 뜻이고, 새롭게 그릴 수 있다는 것은 자유다.


삶의 의미는 처음부터 만들어지지 않는다. 나는 매일 작은 경험 속에서 의미를 구성해간다. 누군가와 나눈 대화 한 줄이 의미가 되기도 하고, 혼자 걷는 밤길의 고요함이 의미의 단서가 되기도 한다. 어떤 날은 해야 할 일을 책임지는 것이 의미가 되고, 또 어떤 날은 아무 의미 없이 누워 있는 것이 나 자신을 지키는 방식이 된다. 의미는 거창하거나 극적일 필요가 없고, 영원히 유지될 필요도 없다. 우리는 매 순간의 선택 속에서 의미를 덧칠하며 산다. 의미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은 삶을 가볍게 만들기도 하고, 스스로의 삶에 책임을 지게 만들기도 한다. 결정은 모두 나에게 달려 있으니까.


왜 사는가?라는 질문은 의미가 이미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유효한 질문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는 그런 정답이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질문 자체를 바꿔야 한다. 왜 사는가? 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 정해진 의미가 없다면, 나는 결국 살아가는 방식 자체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간다.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어떤 관계를 유지할 것인지, 어떤 감정은 지키고 어떤 감정은 놓아버릴 것인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이 모든 것들은 누가 대신 정해줄 수 없고, 내가 해석하고 선택해야만 한다. 의미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된다. 그리고 구성된 의미는 그 사람의 삶에서 유효한 이유가 된다.


하지만 공백은 늘 두렵다. 의미가 사라진 자리는 흔들림을 부른다. 그러나 이 흔들림은 나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다시 확인하게 해주는 계기이기도 하다. 의미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이제 새로운 의미를 만들 기회가 생겼다는 뜻이다. 누구나 언젠가는 허무에 빠지고, 자신이 믿던 가치들이 더 이상 버팀목이 되지 않는 순간을 경험한다. 그 순간은 상실처럼 느껴지지만, 나는 이제 그것을 자유의 시작으로 생각하기로 한다. 남에게서 빌려온 의미로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 타인의 기준과 기대만으로는 내 삶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비로소 자기 삶의 주인이 될 테니까.


나는 여전히 삶의 의미를 모른다. 삶이 왜 시작되었는지 모르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모르며,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남기고 떠나는지도 모른다.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지고, 내가 살아온 것들이 사라져 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이 모름이 부끄러운 것도, 약한 것도 아니라는 것, 오히려 당연하다는 것을. 누구도 삶의 의미를 알고 태어나지 않는다. 삶의 의미는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나는 모르는 것이다. 처음부터 정해진 의미가 없는 세계에서는, 의미를 묻는 사람만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


허무는 이제 나에게 단순한 절망의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스스로 삶을 채울 수 있다는 증거이며, 어떤 방식으로 살아도 좋다는 선언이기도 하겠다. 남이 정한 의미를 따라 살던 시간을 놓아버리고 아직 아무 문장도 적히지 않은 공백을 보며 내 방식으로 문장을 써 내려갈 수 있다는 가능성.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허무의 반대편에 있는 자유다. 이 자유가 존재하기 때문에, 비록 삶은 무질서하고 불확실하며 때로는 공허하지만, 동시에 다시 시작할 수 있고 매일 의미를 새로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내일도 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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