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시간의 예술이며, 그런 영화를 만드는 현장은 곧 시간과 싸움을 벌이는 전쟁터다. 한국영화아카데미의 첫 쿼터 첫 수업 강의를 맡았던 정성일 평론가 님은 이런 내용의 말로 시간의 중요성을 강하게 강조하셨다. 나에게 이 말은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입학식이 있던 그날 아침부터 늦을 뻔한 나였으니까. 그 말의 울림에 따라 한국영화아카데미의 교육 과정을 밟는 1년 동안 참 열심히 뛰어다녔다. 수업에 늦지 않기 위해서.
왜 그렇게 뛰어다녔을까. 미리 준비해서 여유있게 나가면 됐을 텐데. 그것은 이동을 하는 데에 가장 짧게 걸린 시간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습관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20분이 걸릴 거리를 어느날 조금 빠르게 움직여 15분 만에 도착하게 된다. 평소보다 빠르게 도착한 이 특수한 경험이 새로운 기준이 되어, ‘이 거리는 1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20분의 이동 시간을 고려해야 할 거리가 1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 15분을 기준으로 이동 준비를 하다 보니 준비를 하는 데에 여유를 부리게 되고, 그러다 지각을 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새로운 경험의 데이터가 결과적으로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근거로 작용하게 된 셈이다.
대부분의 제작지원 사업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해당 사업에서 요구하는 양식에 맞게 시나리오와 제작계획서, 예산서 등의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서류는 시나리오가 아닐까 한다. 시나리오는 영화의 설계도이기 때문이다. 제작계획서나 예산서도 영화의 제작가능성을 판단하는 데 중요한 근거로 작용하지만, 그 제작계획서와 예산서도 결국 시나리오에서 보이는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되는 점을 생각하면, 역시 시나리오에 가장 공을 들여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그 시나리오를 쓰는 데 얼마나 걸릴까.
이는 글을 쓰는 사람마다, 또 쓰는 글의 내용에 따라 완성에 다르다. 그 시간이 아무리 다르더라도 그 시나리오를 끝내야 하는 시점은 그러나 분명하게 정해져 있다. 바로 마감이다. 제작지원 사업 공모의 접수 마감일 말이다.
손바닥문학상 수상작과 강원영상위원회 단편영화 제작지원작. 지금껏 공모전을 통해 발표한 내 두 단편 작품 또한 이 접수 마감일을 기준으로 완성이 되었다. 완성을 하는 데 각각 5~7일. 대략 일주일의 기간이 걸렸다. 여느 경험과 마찬가지로 이 두 작품의 작업 경험은 나의 데이터가 되어 지금 나의 판단과 선택에 영향을 끼쳤다. 대략 일주일이면 마감일에 맞게 시나리오를 완성할 수 있겠다는, 나름의 근거를 갖춘 판단을 내린 것이다. 앞서 적은, 글을 쓰는 사람마다, 또 쓰는 글의 내용에 따라 완성에 걸리는 시간이 다르다는 사실은 생각지도 않은 채로 말이다.
제작지원 사업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그 마감일에 맞게 제출 서류를 모두 구비해야 한다. 제작계획서와 예산서 등도 착실히 준비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 두 서류 또한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작성되어야 하기에, 시나리오 작업이 늦어지면 그만큼 완성도 면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시나리오 작업이 늦어지면 이와 병행해 틈틈이 그 내용을 채워나갈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투트랙으로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는 얘기다.
강원영상위원회와 영화진흥위원회와 CJ문화재단. 내가 계획한 세 단체의 제작지원 사업 마감일이 저마다 일주일에서 한달 정도 차이를 보인 점은 그래서 다행이었다. 제출 서류의 미흡한 부분을 다음 지원시에 곧바로 수정해 제출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문제라면 한 가지. 내가 그만큼 계획적으로 부지런히 작업을 진행할 수 있을지 하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