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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의 요정이 보내는 편지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과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를 읽고

by 김현주

지은 씨, 어느덧 9월이에요. 아침저녁으로 제법 가을스러운 공기가 피부로 느껴지더라고요. 덥지 않아서 가장 좋은 건 아침 등원길이 조금은 견딜 만해졌다는 점이에요. 큰애는 호기심과 탐구심이 많아요. 무슨 의미인지 아시려나요. 5분이면 갈 길도 15분, 20분, 30분도 걸립니다. 길바닥에 있는 작은 부스러기까지 봐야 해서요. 짧은 등원길이지만 꼭 지나쳐야 하는 구간들이 있어요. 집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보도블록으로 올라갈 땐 항상 “엄마 이 검은 건 뭐야?” 하면서 발밑을 유심히 보다가 움직이거나(벌레), 냄새가 나면(개똥) 그 자리에서 절대 발걸음을 떼지 않습니다. 그러면 저는 둘째를 태운 유아차를 밀며 이미 앞서 가고 있다가 다시 돌아와 아이의 손을 잡고 그 구렁텅이에서 구해줘야 합니다. “괜찮아. 지나오면 아무것도 아니야.”


가로수 주변 무성한 강아지풀을 만나면 무조건 하나씩 뜯으며 강아지풀은 강아지 꼬리를 닮았다고 말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 딸 천재 아닌가 했는데 아마도 어린이집에서 배운 듯해요. 처음 들을 때야 감격스럽고 기특했지, 지금까지 한 천이백 번은 들은 것 같아요. 제가 “그래, 강아지풀은 강아지 꼬리를 닮았지?”하고 맞장구쳐주지 않으면 해줄 때까지 계속 말하거든요. 그냥 “응” 혹은 “맞아”로는 그녀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 뒤로도 몇 달 전 친한 이모의 강아지가 쉬했던 나무를 지나치면 그 이야기도 꼭 해야 하고요, 편의점 전광판에 나오는 광고영상도 꼭 봐야 합니다. 편의점을 지나면서는 “친구들이랑 나눠 먹을 간식을 사고 싶은데.”하는 작지만 간절한 외침도 잊지 않고요. 다행히 편의점 모퉁이를 돌면 바로 어린이집이라 어떻게든 거기만 지나면 기나긴 여정은 마무리됩니다.


매일 같은 길을 지나며 같은 말을 하고 같은 행동을 하기에 큰 감흥 없이 아이가 원하는 말을 기계처럼 해주곤 하는데요. 가끔 새로운 관찰 대상이 생겼을 때 아이가 하는 말이 참 시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엄마 여기 꽃이 피었네

분홍이 많이 피었어

분홍이 많아


엄마 달님은 어디 있지

집에 갔나 봐


익숙한 길 위에서 새로움을 성실하게 찾아내고 경탄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 저도 한발 늦게 참여하게 되기도 해요. 피곤에 절어 등원 완료라는 목표만 생각하며 걷다가 꽃도 보고 하늘도 보라는 아이의 권유에 그제야 주변을 돌아보고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어, 그러게. 어제는 못 봤던 것 같은데 예쁜 꽃이 제법 많이 피었네. 어, 그러게, 구름이 뭉게뭉게 피었다.


첫 편지에서 소개했던 “엄마로 산다는 건 말야 ‘천국을 등에 업고 지옥불을 건너는 거야.’”라는 문장의 주인은 백은선 시인이에요. 지난 2주 동안은 백은선 시인의 시집도 여러 권 들춰보고 산문집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도 읽어보았습니다. 출산 시기와 책들의 출간 시기도 잘 맞춰보면서요. 가장 최근에 나온 시집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에 실린 첫 번째 시는 아이에게 보내는 시였어요.



숨은 귤 찾기

-이선에게


너는 자꾸 귤! 귤! 소리치며 집안을 뛰어다닌다

귤 없어 귤 없어 나는 대답하는데


한밤중에 귤


눈 내리는 밤 오래 걸어 편의점에 다녀왔다

잠 속의 일이었다


이불이 축축해지고 머리가 덤불이 되어 눈뜰 때

날아가는 새


어느 날은 목욕을 하며

종말이 가까워졌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어른이 되지도 못하고 죽는 거냐고

묻는

입이 잔뜩 나온

너에게 거품을 묻혀주었다


눈 내리는 밤의 일이었다


두 발이 푹푹 빠져서

발끝이 아려


빨갛게 부푼 뺨이 어둠 속에서 잠깐 빛났다


귤나무가 집 앞에 있어서

먹고 싶을 때마다

따올 수 있으면 좋겠다


어느 날은 티브이 앞에 앉아

과자를 나눠 먹으며

영화를 봤다


밤이 너무 길구나

너는 도통 잠들 생각을 않고


이런 밤에는 눈도 잠이 든단다

세상을 먼저 재우고 나중에서야 잠에 든단다


잠든 눈을 내려다보며


나는 종치기가 되어 평생 종을 치는

글을 쓰고 새벽이 다 되어

두 손을 포개고

날개를 접었다


귤에 대해 생각하다

빛나는 심장을

쟁반에 담아

식탁에 올려두었다


눈뜨면 네가 제일 먼저 볼 수 있게


어느 날은

중력은 무엇이든 떨어뜨리니까

빛과 무관하게 나는 아플 수 있어서

다행인 날이었다


꽁꽁 얼어버린 빛이 있다

전부 녹아버린 밤의 일이었다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 백은선 시집, 문학동네, 2023.



시인의 다소 어두운 상황과 염세적인 태도를 뚫고 느껴지는 아이를 향한 다정한 마음이 좋았습니다. 다른 시들이 다 이런 분위기는 아니고 어쩌면 약간 오싹하기도 하고 기괴한, 혹은 난해한 시들도 많았어요. 저 같은 범인이 시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는 건 어렵겠다고 느껴지기도 했지만 간혹 이해할 수 있는 엄마의 마음이 보일 땐 그게 그렇게 반가웠습니다. 백은선 시인에 관해 찾아보다가 한 인터뷰를 읽었는데, 실제로 시인은 아이를 낳고 시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대요. 관성적으로 죽음과 종말에 관한 생각을 하다가 너무 사랑하는 존재가 생겨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요.


나는 매일 혼자 집에서 아이만 쳐다보며, 젖 기계가 된 나를 보며, 치받는 마음을 억눌러야만 했다. 얘는 내가 전부니까. 내가 사랑해줘야 하니까. 그 절대적인 사랑과 헌신이 나를 갉아먹으면서도 나를 살렸다.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아이는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라고.
사랑에 대한 갈망을 채워준 건 아이다. 절대로 나를 떠나지 않을 마지막 한 사람이 되어준 것으로.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 81쪽)


아이는 정말 내 세계를 뒤흔듭니다. 지금 옆에 나란히 앉은 남편에게 출산 전후로 어떤 부분이 가장 많이 달라진 것 같냐고 물으니 화가 많아졌다고 하네요. (...) 아이가 생기고 나서 신체도 성격도 마음가짐도 어쩌면 기질까지도 바뀐 것 같아요. 아이가 없을 땐 정말 화낼 일이 없었던 것 같은데요. 지금은 복식호흡으로 소리를 얼마나 잘 지르는지 모릅니다. 얼마 전 아이들하고 오랜만에 사진을 찍었는데 조금 슬펐어요. 아이들은 이렇게 생생하고 아름다운데 저만 폭삭 늙은 것 같아서요. 내 생명력이 옮겨갔구나. 슬프지만 아깝지는 않았습니다. 근데 좀 많이 슬펐습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이 얘기를 했다가 시 얘기를 했다가 아이가 내 삶에 미치는 영향을 이야기하려다 말다가. 이게 다 출산과 육아 때문이라고 쳐야겠습니다. 정리되지 않은 글이 부끄럽네요 지은 씨. 몸도 마음도 삶도 살림도 말도 글도 잘 정돈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치만 이게 다 출산과 육아 때문이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흑흑


파편이 내 삶의 숙명 같아요. 엄마로 시인으로 작가로 가사노동자로 선생으로 살면서 매일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습니다. 그래, 그게 숙명이라면 파편의 대마왕이 되고 말 거야.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 14-15쪽)


파편은 숙명 같다는 시인의 말이 백번 이해되는 날들입니다. 오늘도 나는 찢어지고 쪼개지겠지요. 내일도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저는 파편의 요정이 될래요.


2025년 9월 7일

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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