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후쿠오카 동물원, 고독한 기린

동물원의 역사를 되짚어보다.

by 정호재
기린.jpg


처음으로 제대로 기린을 봤다


그전에도 기린을 본 적이 있기는 했다. 동물원에 가서 기린을 보면 그냥 동물이구나, 하고 넘길 때가 많았다. 과거의 나는 동물보다는 나란 사람에 대해 관심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후쿠오카 동물원에서 본 기린은 한없이 영롱하고, 고독해 보였고, 신화에 나올 법한 느낌을 주었다.


5m가 넘는 키에, 가만히 서 있어도 숨길 수 없는 영롱한 자태, 우아한 걸음걸이까지… 굉장히 멋지다고 생각하면서도, 울타리에 갇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 모습이 감옥에 갇힌 광대처럼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사실 동물에게서 언뜻 느껴지는 쓸쓸함은 기린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에게도 느꼈다. 어떤 구관조처럼 생긴 새는—학술명처럼 복잡한 이름이었다— 고통스러운 듯이 철창 너머로 꽤 애애액, 하고 울고 있었다. 반달 가슴곰은 불안한지 정신없이 주위를 돌아다녔고, 보아뱀은 이 평도 안 되는 공간에서 죽어 있는 것처럼 똬리를 틀고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그 쓸쓸한 동물들을 보며, 이런 식의 동물원은 언제, 어디서 생겨났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동물원을 만든 데에는 여러 복잡한 이유가 있었다.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 권력층에게는 동물이 ‘힘’의 상징이었다. 호랑이나 사자 같은 맹수 동물들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힘을 과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대 로마로 거슬러 와서는, 동물은 유희의 수단이었다. 콜로세움에 호랑이나 사자와 같은 맹수와 인간을 두고 싸움을 벌이는 베나치오가 벌어졌다. 당시 로마에서는 오늘날의 축구처럼 유행하는 ‘스포츠’의 한 종류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영화 <글리디에이터>에서도 막시무스가 호랑이와 싸우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침을 튀기며 흥분하는 관객들의 모습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들을 보면 오늘날 순수하게 축구에 열광하는 관람객들 같은 모습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인간에게는 폭력성을 분출할 만한 공간이 점점 인간에게 안전한 쪽으로 발전하게 된 게 아닐까?


우리가 아는 최초의 현대적 동물원은 1752년 오스트리아의 쇤브룬 동물원이다.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프란츠 1세가 관리했던 개인 동물원이 발전된 형태라고 한다. 쉰부르 동물원의 초기 개장 시절, 코끼리, 낙타, 얼룩말 등 약 13종 정도의 동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래도 굉장하다. 어쨌든 정원에 코끼리 같은 동물을 관리할 수 있을 정도였으면, 어마어마하게 집이 크지 않았을까 싶다.


동물원이 만들어진 데에는 여러 가설이 존재하지만, 결국 ‘권력’과 결부된 게 아닐까 싶다. 특히 인간의 권력 싸움에서 동물은 철저히 수단으로써 존재하지 않았을까… 권력 자체가 나쁜 게 아니다. 권력을 통해 대상을 객체화시키고 착취하려고 할 때, 오염되는 게 아닐까 싶다.


그 후에 동물원을 한 바퀴 돌아 원숭이, 펭귄, 구관조, 낙타와 코끼리 등 정말 많은 동물을 봤다. 하지만 그 광대처럼 쓸쓸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기린이 기억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 기린도 카프카의 <단식 광대>가 단식으로 항의했듯이 그렇게 가만히 서서 나를 바라본 게 아닐까?


현대 동물학자들은 인간이 감정을 느낄 때 활성화되는 뇌 부위(편도체 같은)가 포유류 동물들에게도 존재한다고 하며, 동물들도 감정을 느끼는 유사한 감각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물론, 인간처럼 고독을 철학적으로 사유하고 개념화하지는 않겠지만, 그들도 분명 외로움이란 걸 느낀다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봤던 기린은 정말 쓸쓸해서 나를 그렇게 쳐다봤던 게 아닐까?




여담. '기린'은 왜 영화나 문학이나 음악에서 자주 소재로 쓰일까? 유달리 자주 쓰이는 것 같단 말이죠. 왜일까요?





keyword
이전 02화일본식  구축 아파트, 보이지 않는 바퀴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