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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녕 쌩글삶글 Jan 26. 2019

정류장에서
마음과 마음 이어주는 사람들

- 내 동네 정류장에 작은도서관 하나

그러니까 100일쯤 전부터 논산 내동 동신아파트 버스 정류장의 빈공간이 책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책장 두 개가 세워지더니만, 그곳에 40~50여권 책이 빼곡 들어찼다. 요즘은 책만 놓여 있는 게 아니다. 연말이 되자 달력도 조달된다. 이 회사, 저 가게에서 챙겨와 갖다놓는데, 그 달력이 불티나게 나간다. 요즘은 칼렌더 나누어 주는 곳도 별로 없기 때문에 절찬리 인기품목이다. 암 예방법 등 병원에서 나오는 팜플렛도 진열되지만, 거기에는 손이 자주 가지 않는 편이다. 


이것들 없이 단촐했을 때 시민들은 버스 정류장에서 오지 않는 801번 버스를 하념없이 기다렸다. 그 지루함을 달랠 겸 짜투리 시간에 무언가라도 배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계배터리 총판업을 하면서 오가는 이 아파트 주민 유성한 씨는 한 가지 생각을 해냈다. “그래, 저기에다가 책을 갖다 놓자!” 유 씨는 그 생각을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8만원 들여서 나무 책장 두 개를 장만하고 거기에 책을 한권씩 한권씩 꽂아가기 시작하였다. 문화원 발행책부터 챙겨왔다. 개인이 운영하는 분위기로 보이면, 혹 손탈지도 몰아서, 관공서 분위기로 몰고갔다. 저자들에게도 찾아갔다. 건양대 상담심리학과 김승종 교수 저서 몇 권과 윤석일 목사 최근작 “행복한 종의 노래”도 한가득 얻어왔다. 집에 있는 책도 방출했고, 지인들에게 안 보는 책 있으면 내놓으라고 하여서 채워나갔다. 

요즘도 하루에 한 번씩 찾아간다. 먼지가 심한 길가라서 털이개 비치해놓고 갈 때마다 먼지를 털며 혹여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펴본다. 안내문도 붙여 놓았다. 인쇄 글자는 잘 안 보므로, 손글씨로 “책을 가져가시되, 나중에 돌려주세요!” 그러나 돌아오는 책은 거의 없었다. 가끔 이럴 때 관리자는 속상해야겠지만, 책이 없어질수록 기분은 좋아졌다. 문중에서 나온 고리타분한 책도 내놔봤는데, 그런 책이 사라질 때도 있었다. 인기가 없을 거 같은 성경책도 얇은 신약과 두터운 전서 가끔씩 갖다놓았는데, 지금까지 총 3권이 없어졌다. 어쩌다 한두 권씩만 없어지는 걸 보니까, 고물상에게 넘어가는 거 같지는 않다.


요즘 고등학생들은 책을 거의 보지 않는다. 7명 중에 한명 볼까말까라는 통계를 접하면서, 유성한 씨는 동네사람들이 책과 친해지는 길, 뭐 없을까 고민해 보았다. 그 중 하나가, 손 닿는 데 책을 두어보자는 것이다. 우리가 화장실에서 무료해지면 책을 잡아드는 것과 같은 심리를 확대하여서..... 그 다음으로 생각해 보는 건, 문학작품과 자주 접하게 하는 기회이다. TV에서 어떤 독서클럽이 책 돌려보는 장면을 보고 힌트를 얻어서 책을 거리로 노출시켰지만, 안 보는 사람은 여전히 거들떠 보지 않는다. “벽에다가 시 같은 것을 장식하면 어떨까?” 마침, 동신아파트에는 3미터 높이의 담벼락이 있다. 덕수궁 돌담길 같은 분위기에다가 시 판넬을 걸어둔다면?? 그 판넬은 문화원 시창작반에서 이미 제작해 놓은 것으로, 전시가 끝날 때 운반해다가 걸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영구 고정시키는 게 아니라, 새로운 작품이 나올 때마다 교체하면 된다. 이런 식으로, 8각전등 가로수 불빛 아래로 자그만 문화 명소를 구상중이다. 


보람찬 일 동조하는 조력자들


이 시 판넬이나 진열 책은 비바람이 바짝 신경 쓰인다. 어느날 보니까 혹여라도 책장이 넘어지지 않도록 누군가 힘을 들여서 철다리를 안정적으로 조정해 놓았다. 동조하는 조력자가 생겨나는 조짐이다. 


책으로 부조하는 이 중에서 같은 시창작반인 전일갑 옹이 있다. 이번 시화전에서 “6학년 21반”이란 시를 써낸 동네시인인데, 요즘은 민화 동양화에도 열정을 불사르는 노익장이시다. 동신아파트 정류장 상황을 한동안 지켜보며 벤치마킹을 하더니, 일주일쯤 전에는 논산고등학교 정류장에다 분점(?)을 차렸다. 책장은 먹골 자택에 있는 거 실어가고, 집에 있던 책 위주로 20~30권 챙겨다 놓았다. 


돈을 안 들이려다보니 아직은 대중적인 책이 별로 없지만, 이리 시작해놓으면 누구라도 판을 더 벌일 거라는 기대감도 있다. 어디 책뿐이랴~ 운영하기에 따라서 동신아파트처럼 재활용 가능한 물품들이 소통되는 플랫폼이 될 수도 있다. 플리마켓, 아나바다 장터는 어쩌다 열려서 아쉽기만 하던 터에, 논산고등학교 버스정류장 플랫폼은 공생(共生)의 모델을 제시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을 가져보는 동안, 여간해서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영화 속 주인공 ‘포레스트 검프’가 논산 버스정류장에서 리메이킹되는 듯싶다.


[글·사진] 이지녕 


(이 기사는 놀뫼신문 2018-12-26일자 3면에 실렸습니다)

https://nmn.ff.or.kr/21/?idx=1473651&bmod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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