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간역을 다녀와서
유종호교수님의 책 "회상기-나의 1950년"과 더불어 황간을 다녀왔습니다. 유명하다는 덕승관 짜장면도 먹고 월류봉도 다녀오고 황간을 느끼는 첫 마음은 차분함이었습니다. 어디든 떠들석하지 않고 정갈한 느낌입니다. 일정이 바빠 한바퀴돌고 바로 황간역으로 왔습니다. 시골 간이역같은 느낌이 들어도 선로가 많이 있는 걸봐서는 제법 많은 열차들이 정차하거나 지나는 역일거라는 느낌이듭니다. 아무래도 경부선이 통과하는 역이라서 그렇겠지요. 그 옛날에는 더 많은 열차가 정차하던 역이었겠지만 이제 이런 역들도 쇄락하여 간이역처럼 되어버립니다. 대합실에 들어가보니 면소재지에 있는 역치고는 드나드는 사람도 제법되는 것같습니다. 몇평되지 않을 것같은 대합실엔 서너명의 여행객들이 끼리끼리 앉아서 곧 도착하는 기차를 기다리며 담소를 나누고 있습니다. 관광객들 같아 보이진 않습니다. 이곳 주민이거나 이곳의 지인을 찾아온 듯한 손님으로 보여집니다. 역마당 군데군데에는 조경에도 제법 신경쓰는 티가 납니다.
마침 "고향의 시담은 항아리"라는 전시행사를 하는 것같습니다. 항아리에 시를 쓰고 감상하게 하는 모양인데 꽤나 정감있고 소박하게 보입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역장님께서 황간역을 문화공간으로 바꾸기 위해 여러모로 애쓰신다고 합니다. 블러그도 개설하셔서 황간역 알리기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것같습니다. 시도 전시하고 음악회도 열고 작은 간이역이지만 문화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많은 사람을 불러모으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참 자전거도 대여해주네요. 미리 예약을 하여야 한다는데 가까운 월류봉이나 한적한 시골길을 자전거로 여행하는 것도 꽤나 여유롭고 운치있어보입니다.
한적한 면소재지의 낮은 건물들, 그들과 어우러진 산과 숲들이 피곤에 지친눈을 시원하게 합니다. 한동안 살아보아도 그리 심심하진 않을 것같은 황간입니다. 이런 곳은 사람을 평화롭게 합니다. 어디든 발길을 놓아도 넉넉한 인심이 웃게 만들것 같습니다.
읽고있던 유종호교수님의 회상기에 나오는 배경이 바로 이런 한적한 시골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흔히 전쟁, 하면 전투와 전사와 부상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화끈하게 처절하고 화끈하게 비통한 국면이지만 은근히 사람을 골탕 먹이는 고약한 국면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전쟁터에 나갔다가 사지는 멀쩡하게 돌아왔지만 속으로 골병이 든 경우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부수적인 재난이 많은 사람을 파국으로 몰아넣고 전도양양한 젊은이를 맥없이 쓰러트린다. 가난도 마찬가지다. 굶주림만이 가난의 특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가령 가난에서 유래한 영양부족이 많은 유위한 젊음들을 폐결핵으로 피 토하며 쓰러지게 했다는 것은 쉬 상상되지 않는다. 그런 맥락에서 상상력의 교육이야말로 교육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우리 처지에서는 아직 머나먼 구름 같은 얘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61p
이 책은 전쟁통에 격게된 여러가지 에피소드를 엮어 펴낸 책입니다. 총알이 빗발치고 포탄이 떨어지는 그런 전쟁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전쟁통에 못먹고 못먹게된 그래서 더욱 궁핍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들입니다. 전쟁세대가 아니라서 그 시절을 오롯이 공감하고 추억할 수는 없지만 그 시절의 풍경들이 우리 아버지 어머니세대의 이야기들이다보니 나도 전에 들었던 이야기들이 아 그건 그랬겠구나 상상하게 됩니다.
그 시절이면 나오던 좌익과 우익의 잔인했던 대립도 없습니다. 거긴 그저 인간적인 풍경들만 풍성합니다.
살다 보면 절망감 비슷한 것을 겪게 마련이다.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고 깊으면서도 곧 담담해지는 경우도 있다, 빨간자위 눈을 하고 단신 마스막재를 넘어와서 닫힌 병원에 헛걸음을 두 걸음이나 하고 나니 맥이 빠지고 속상하기 짝이 없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시퍼런 젊은이가 픽픽 쓰러지는 판국에 안질 때문에 절망감을 느꼈다고 하면 핀잔 받을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의 떡과 행운이 커 보이듯이 내 고뿔이나 불운이 커 보였다고 해서 누가 내게 흰자위를 굴릴 수 있을 것인가? 232p
전쟁통에도 안질에 걸린 지은이가 병원을 다녀오기 위해 재를 넘는 이야기에서는 왠지모를 측은함마져도 느껴집니다. 폭격이 언제 있을지도 모르는 시기에 담담하게 먼길을 걸어 병원을 찾는 그 절박함이 고작 눈병이라는 사실에 지은이 역시 피식하고 웃을 수 밖에 없겠지만, 그 평온한 마음과 풍경은 이 회상기가 1950년 사변직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하게 합니다. 물론 이야기의 곳곳에는 죽을 뻔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렇치만 왠일인지 인민군이나, 또는 폭격에 창고가 무너지고 죽을 뻔한 이야기에서도 간담을 서늘하게 하거나 전쟁의 공포를 느끼기에는 모자람이 있습니다. 아마도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전쟁영화나 극적인 소설적 구도가 아니라 에세이 형식의 글이라서 그런지 모르겟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공포심이 감소된 전쟁의 기억들이 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잔인함마저 격감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상적인 삶을 통째로 바꿔버리는 전쟁이라는 사건에 대한 담담한 증언이 우리를 긴박감과 공포심, 그리고 미래의 삶에 대한 두려움속으로 밀어넣어버립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 전쟁의 끝이 그러합니다. 3개월이 될지, 3년이 될지, 30년이 될지,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지금의 궁핍과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자유의 결핍을 두려워하게 합니다. 더구나 거기서 생명의 끝을 예상할 수있을 때 우리는 더욱더 참담한 현실을 살게됩니다. 총에 맞아죽고 파편에 맞아 죽는 것보다 궁핍으로 인해 격는 영양실조와 그 앙상한 자유의 끝을 더욱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로 비롯된 비참한 자기결정은 그후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전쟁보다 더 혹독하고 잔인하고 흉폭한 일들이 수복 이후에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책의 후반부에 증언된 수복 이후 벌어진 동족간의 참극 "부역행위특별조치법"에 따른 허용된 살인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수복 이전의 전쟁상황보다도 더욱 잔인한 참상이었습니다. 사변이 나자마자 국민들의 안위를 제쳐두고 부산으로 도망쳤던 국가권력이 수복이후 다시 돌아와 자기반성도 없이 기계적이고 획일적으로 행한 부역자 처리는 그 시대의 그것만이 아닌 조선시대 부터 있어왔고 일본식민지 시대의 친일잔재를 거쳐 이승만정권에게서도 잔인하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국민을 지켜주지 못하고 적절한 초기대응도 하지 못한 국가가 어떻게든 살기위해 몸부림쳤던 국민들에게 그 사상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인지 지금 역시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다는 자괴감마저 느껴져 더욱 슬퍼졌습니다.
우리 동년배들도 60년 전의 참호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상기를 시켜도 복원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무서운 사실도 세월 앞에서는 모두 지워지는 것 같다. 무서운 사실이 지속적으로 새로 생겨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은 나라에서 살아갑니다. 잊지 말아야할 것들이 세월속에서 바래고 지워지고 잊혀져서는 않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고 그것을 지우려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더욱더 기억에 매달려야 합니다. 또 다시 기억해야할 것들이 생기지 않아야 하기에 그 기억해야할 것들은 잊지말아야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