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소망

by 이상역

봄날 아침 직장에 출근하는 길이다. 지하철 과천청사역에서 내리면 매번 7번 출구로 나간다.


그 출구를 나오면 청사로 가는 길이 세 갈래다. 가로수가 정갈한 보도블록 길과 흙으로 다져진 운동장 길과 제방을 따라가는 길로 갈라진다.


그중에 가로수가 정갈한 보도블록 길을 선택해서 걸어가면 나와 같이 출근하는 사람과 책가방을 들고 학교에 가는 학생과 아침부터 배낭을 메고 관악산으로 등산 가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게다가 넓은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젊은이들의 목소리가 더해지면 출근길은 부산해진다. 그 길을 벗어나 울타리 사이에 난 입구로 들어와 사무실 의자에 앉으면 창문 너머로 관악산이 바라보인다.


산자락에는 연둣빛 초록과 분홍색 진달래가 꽃 잔치를 벌이는 봄날의 풍경이 그림처럼 들어온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계절의 변화에 민감해진다.


계절의 순환에 따라 봄을 맞이하는 마음에는 찬양과 찬미와 경이감만 높아간다. 나이는 계절을 따라 익어 간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나이는 세월을 늘려가는 단위에 불과할 뿐인데도 계절을 보고 느끼는 감정의 깊이는 깊고 그윽해진다. 나이와 계절은 연관성이 많은 족속인가 보다.


매일 같이 나를 찾아 떠나는 일상의 여정에서 나를 반겨주는 것은 계절이다. 가족과 직장의 동료보다 계절이 스스로 변화하며 맞이해 주면 마치 날마다 여행 가는 기분과 느낌을 전해주면서 나를 더욱 설레게 한다.


요즈음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도 묶여 사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다. 그저 마음만 앞서고,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도 나를 붙잡는 무언가로 인해 가지 못하는 서글픔.


정녕 이 삶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 강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집과 직장을 오롯이 오가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박쥐와 같은 신세가 처량하다.


박쥐는 동굴에서 마음껏 제 삶을 누리며 산다지만 나의 동굴은 나를 옥죄는 무섭고 두려운 감옥과도 같다. 관악산 산마루에 걸친 흰 구름 조각만이 내 마음을 아는 양 오늘도 바람을 따라 이산 저산을 떠다닌다.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사월보다 구름에 가린 사월이 나를 더 위무해 주는 것 같다. 사월의 햇살이 사람의 외출을 자극한다지만 구름에 가린 사월은 외출을 자제하는 억지력을 작동한다.


봄이 되면 누구나 소망하는 것이 있다지만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며 살아갈 수는 없다. 더해서 소망은 꿈이나 동경으로 즐기는 희망일 뿐. 자신이 바라는 소망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 것은, 미래의 소망을 소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영혼의 편지에서 빈 화선지 앞에서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자신이 가고자 하는 예술가의 길이 진정 무엇인가에 대한 고뇌를 털어놓았다.


생각해 보면 과거의 사람이 오늘의 사람보다 더 순수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가난한 자의 영혼이 순수하듯이 삶의 질이 높아질수록 사람의 영혼에는 이끼와 때가 끼어 순수를 잃어간다.


오롯이 소설과 詩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 다른 것은 바라보지 않고 소설과 詩만을 짓기 위해 살아간다면 대부분 가난과 외로움과 싸우며 고독한 날을 보내야 할 것이다.


내가 맞이하는 오늘도 어쩌면 이 세상에서 마지막이다. 내일이면 어제와 다른 오늘이 찾아오는 것은 삶의 질서다. 오늘 바라본 나무의 새싹도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다르다. 소나무 솔잎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절과 시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이파리다.


사시사철 변하지 않는 것이 상록수라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변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 것처럼 나 또한 계절과 시간에 따라 변하는 자연의 한 부분이다.


나만이 나의 변화를 모를 뿐 자연은 나를 내려다보며 오늘도 어제와 다른 나를 대하고 있을 것이다. 관악산의 나뭇잎도 연한 푸른 새싹이 올라오면서 연두색으로 변해간다.


푸른 새싹이 자라서 산이 숲으로 덮일 때면 사람들은 다시 희망을 노래할 것이다. 푸른 계절이 모든 것을 성장시킨다는 말이 있다. 계절이 성장하면 사람들은 다시 산을 찾게 되고 또한 자신을 찾아 떠나는 삶의 여정에 들어설 것이다.


희뿌연 하늘이 봄의 왕성한 기운을 누그러트리며 사월을 노래한다. 무릇 생명은 그 삶이 다할 때까지 아름답고 푸른 새싹은 언제나 미래를 바라보는 희망이다.


하루가 시간에 따라 성장해 가듯이 시간이 지날수록 구름이 차츰차츰 벗겨지면서 날이 밝아진다. 정오가 가까워질수록 구름층이 엷어지고 태양을 가리는 힘이 줄어들었다.


초록의 나뭇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봄꽃은 다른 꽃보다 인내와 기다림에 익숙하다. 봄꽃은 봄꽃이 진 순간부터 나뭇가지 끝에서 꽃눈을 준비한다.


그렇게 삭풍이 몰아치는 눈보라와 겨울날의 차가운 온도를 견뎌낸 결과 봄날에 온도가 상승하면서 피워낸 결실이 꽃이다.


세상에서 무료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 하나라도 얻기 위해서는 정성과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나뭇잎보다 먼저 핀 봄꽃의 노력처럼 나도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정성과 노력과 인내와 기다림이란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도 어제처럼 가는 봄날 앞에서 마음의 애간장만 태우는 신세다. 사람의 인연처럼 아름답고 소중한 만남은 없다. 그 만남에 인생의 꽃을 피우고 삶을 누리는 것이다.


추운 겨울을 이겨낸 봄날의 화사한 꽃처럼 나도 아름다운 만남을 봄꽃으로 승화시키는 참된 인생을 살아가야겠다. 그것이 내가 삶을 누리며 할 수 있는 축복된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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