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여름이 다가온다. 한창 성장하던 시절엔 계절의 흐름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는데 지천명이 다가오자 세월이 물처럼 흘러가는 것이 느껴지고 사람도 때가 되면 바뀐다는 순환의 법칙을 깨닫게 된다.
사람은 죽지 않을 것이란 견고한 믿음도 무너지고, 사람도 어쩔 수 없이 시간을 따라 흘러가고 흘러오는 고리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다.
세상사가 참으로 무심하고 무상하기만 하다. 나와 친했던 사람이 하나둘씩 곁을 떠나갈 때마다 느끼는 관계의 외로움. 삶이란 관계의 틀을 벗어날 수 없는 한계이자 업보란 생각이 든다.
휴일 날 빈 사무실에 나와 말 없는 컴퓨터의 자판기나 두드리는 신세다. 컴퓨터를 켜고 빈 화면을 만나면 새로운 세상을 만날 것이란 기대감에 가슴은 두근거린다.
그렇게 빈 화면을 마주하고 시선을 집중해서 하나둘씩 단어를 저울질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마음을 진솔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무능함이다.
내 마음속에 간직된 솔직한 생각을 표현해 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번민과 후회하는 감정만 생겨난다. 화면의 여백이 한줄한줄씩 줄어들 때마다 삶의 핑계만 늘어나는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삶이란 것도 별것 아닌데 왜 있는 그대로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자꾸만 핑계로 포장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자신의 삶을 앞에 두고 변명하지 않을 사람이 없듯이 화면의 여백 앞에만 서면 이런저런 핑계와 변명하는 마음만 생겨난다.
잠시 하던 일을 접고 의자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 초록의 바다를 바라본다. 창문을 열어젖히자 시원한 선들바람이 불어오고 하늘은 맑고 날씨도 따뜻해서 외출하기에 좋은 날이다.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에 무미건조한 책상에 앉아 자판기나 두드리는 신세라니. 지금이라도 사무실을 뛰쳐나가 자연을 벗 삼아 초록이 우거진 숲 속을 이리저리 거닐어 보고 싶다.
바깥 시선을 거두고 다시 의자에 앉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물결이 일렁이는 대로 화면을 채워본다. 하지만 생각의 파도만 깊어질 뿐 앞을 가로막는 장벽이 있어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되돌아본다.
시간이 지날수록 긴장감은 느슨해지고 화면의 여백이 줄어들수록 무언가를 메웠다는 충만감보다 마음이 허전하고 공허해진다. 왜! 마음을 더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것일까.
무엇이 나를 머뭇거리게 하고 무엇이 나를 바람결에 나부끼는 나뭇잎처럼 생각의 돛대를 이리저리 흔들어 대는 것일까. 단어 하나 동사 하나가 가던 길을 멈추게 하고 무언가를 생각하며 기다리는 이 시간.
빈 여백에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채우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깃발과 같이 나부끼는 생각과 허공을 떠도는 마음이나마 건져 올린 것이다.
내가 무슨 사연을 전하려고 자판기까지 두드려가며 넋두리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저 물이 아래로 흐르듯이 끝없이 일어나는 상념을 따라 이곳까지 흘러왔다.
지금까지 머릿속에 무시로 떠오르는 상념을 그리는 과정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 인생이 늘 그러하듯이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아무것도 없다.
단지 내가 지금 어느 곳에 머물며 어떤 생각의 강을 따라 마음이 흘러가고 흘러왔는지를 확인한 것뿐이다. 아직도 내 마음에는 나도 알 수 없는 무수한 것들이 깊은 심연의 바다에 고여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세상이란 바다에 나와 마음의 곁다리도 제대로 두드리지도 못하고 떠날지도 모른다. 어떠한 삶이 되었든 오늘이란 이 순간에 진솔하게 다가간 계기는 되었을까.
내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이 튀어나오든 그리고 자판기로 어떤 세상을 그려 나가든 삶이란 마음자리를 떠돌며 여행하는 과객이 될 수밖에 없다.
그저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데 왜 그리도 삶에 대한 변명과 핑계가 많은 것인지 삶이 허허로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