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길을 걷다가 자줏빛 색깔로 무리 지어 핀 라일락꽃을 종종 보게 된다. 라일락꽃은 꽃 이름만 불러도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옛 추억을 생각나게 한다.
라일락꽃 피는 봄이 오면 만나자던 옛사랑과 추억의 무늬결. 길가에 핀 라일락꽃에 다가가 코끝을 살짝 대어 보면 은은하게 밀려오는 아로마 같은 향기가 난다.
라일락꽃은 바라만봐도 잔잔한 미소를 짓게 하고 꽃의 진한 향기를 맡으며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면 잃어버린 동심의 옛 시절이 불현듯 떠오른다.
꽃은 진종일 비에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빗방울 무게도 가누기 힘들어
출렁 허리가 휘는
꽃의 오후
꽃은 하루 종일 비에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빗물에 연보라 여린 빛이
창백하게 흘러내리듯
순한 얼굴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꽃은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도종환, '라일락 꽃').
어느 시인의 詩라서 마음을 아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라일락꽃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여윈 마음이 더 가슴을 아프게 한다.
빗물에 젖은 채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끼는 라일락꽃의 너울거림을 바라보면 누구나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길가에 핀 라일락꽃은 바라만 봐도 처연함이 느껴지는데 빗물에 젖은 라일락꽃은 처연함을 넘어 그 이상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詩人이 비에 젖은 라일락꽃을 바라보며 시구를 그린 마음은 무슨 색깔일까. 빗물에 젖지 않는 보라색일까 아니면 꽃 자체의 순수함일까.
사월은 라일락꽃이 계절을 지휘하는 꽃처럼 다가온다. 사월의 이유 있는 아픔처럼 출근길 곳곳에서 피어나는 라일락꽃에서도 계절의 슬픔을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런 슬픈 계절에 빗물이 더해지고 연보라색이 더해지자 라일락꽃이 더욱 창백하게 바라보이는 것 아닐까. 집 주변에 핀 라일락꽃이나 길가에 핀 라일락꽃이나 나무는 같다.
단지 빗물에 젖어가는 라일락꽃은 장소에 따라 달리 보일 뿐이다. 그리고 꽃을 향해 불어오는 바람의 세기와 스쳐가는 바람에 이리저리 부대끼는 기울기만 다르다.
사무실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며 소리 없이 지나가는 사월을 멍하니 바라보는 중이다. 계절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딘가를 향해 정처 없이 강물처럼 흘러만 간다.
오늘은 다행히 비가 내리지 않아 라일락꽃에 담긴 애처로움이 덜하다. 사무실 안과 밖의 시간은 동일하게 흘러간다지만, 라일락꽃은 시간의 흐름에 상관없이 홀로 바람을 맞으며 자줏빛 꽃에서 향기를 피운다.
우리네 삶도 라일락꽃처럼 은은하게 향기를 피우며 살아갔으면 좋으련만. 삶은 라일락꽃처럼 애처롭지도 화려하지도 그리고 계절의 흐름에 상관하지 않고 흘러가지는 않는다.
삶에는 화려함이 있으면 쓸쓸함이 따르고 순환하는 계절의 간섭과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라일락꽃 피는 봄이 오면 만나자던 사랑과 추억도 잊은 지 오래다.
그런 애달픈 마음에 세월을 노래하고 라일락꽃 향기를 맡으며 계절의 변두리를 거닐고 싶다. 내일은 라일락꽃처럼 애처롭지는 않더라도 자줏빛 꽃을 머리에 두르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참된 하루를 맞이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