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물에 스며든 마음

by 이상역

아침에 천변 산책을 나가려는데 비가 올 것 같지 않아 우산을 가져가지 않았다. 탄천변 가락시장 옆 다리까지 걸어가서 간단한 체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가랑비가 바이올린 선율처럼 춤을 추며 내린다.


가랑비를 맞으며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빗줄기가 점점 비올라의 소리처럼 굵어졌다. 가랑비가 내릴 때는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면 빗물이 얼굴로 쏟아져 내리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굵은 빗물이 내리면 얼굴을 들어 하늘을 쳐다볼 수 없다.


천변을 걸어가며 아내에게 전화해서 우산을 갖고 마중 나와달라고 부탁하자 다리밑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오란다. 어쩔 수 없이 잠시 비를 피하기 위해 다리밑에 들어가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데 빗소리가 차츰차츰 큰 소리로 돌려온다.


다리 위로는 트럭이 내달리며 덜컹거리고 빗소리는 야금야금 주변의 소음을 먹어 치운다. 그냥 내리는 비를 맞아가며 걸어가고 싶지만 다리밑 의자에 앉아 비 그치기를 기다리는 것도 꽤 운치가 있다.


다리밑에는 나뿐만 아니라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여럿이다. 굵은 비가 내리니 세상은 빗소리로 고요해지면서 그 빗소리가 나를 다른 세상으로 서서히 이끌어 간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시간에 고요한 정적을 깨트리는 빗소리를 통해 전영록이 부르는 '저녁놀'의 노랫가락이 저 멀리서 반주를 타고 들려오는 듯하다.


이 어둠이 오기 전에 나를 데려가주오

장밋빛 그을린 저곳으로 나를 데려가주오


깊은 밤이 오기 전에 나를 머물게 해 주오

그녀의 하얀 볼이 빨갛게 보이니까요


이 세상 모든 행복이 나의 마음속에서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영원하니까


깊은 밤이 오기 전에 나를 머물게 해 주오

그녀의 하얀 볼이 빨갛게 보이니까요


흩뿌리는 빗물 사이로 노래가 너울너울 파도를 타고 아련하게 밀려오는 것만 같다. 저녁놀은 가사도 멋지고 노래도 좋다. 그리고 노래의 배경음악은 나를 또 다른 세상으로 안내하려는 듯 그리움이란 선율을 뿌리며 빗물을 따라 춤을 춘다.


걷는 것도 접어두고 인생의 고민도 접어두고 빗물이나 맞으며 노래나 큰 소리로 부르며 노래 속 세상으로 빠져들고 싶다. 빗물과 마음이 어우렁더우렁 서로 치고받고 싸우고 교감하면서 마음의 바다를 휘젓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전영록의 저녁놀 노랫소리도 잦아들고 빗물 소리도 서서히 잦아든다. 천변에서 비를 피하기 위해 다리밑에 들어가 비 그치기를 기다려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지난 시절 비가 내리는 날이면 시골집 대청마루에 대자로 누워 목청을 돋우며 노래를 부르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무도 찾아오는 이가 없는 마루에 누워 초가의 처마에서 하염없이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를 들으며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런 아련한 옛 생각과 비가 그치면 집으로 가야지 하는 현실이 서로 중첩되어 머릿속에서 충돌한다. 이렇게 다리밑에 앉아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는 나는 누구일까. 왜 하필이면 다리밑에 들어와서 어정쩡하게 비 그치기를 기다리는 것일까.


이 시간에 가야 할 길을 잃고 목적 없는 곳으로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은 누구일까. 오늘따라 빗소리가 마음을 적시면서 과거의 기억 속으로 한없이 빠져 들게 한다. 모처럼 집에 올라와 비를 맞으며 걸어보는 천변길.


천변길에도 이태리포플러가 한소끔 자라서 길과 어우러졌다. 허허벌판에 포플러 나무를 심을 때는 이곳에 무엇하러 심을까 홍수로 쓰러지면 그만인데 하고 걱정했는데 포플러가 그늘을 드리울 정도로 자라자 오솔길로 변했다.


빗물에 하늘하늘 흔들거리는 포플러 이파리가 천변에서 자라는 연약한 갈대와도 같다. 그런 이파리를 바라보며 나는 지금 어디에 있고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 삶일까 하는 것을 떠올려본다.


하늘은 빗물을 모두 토해냈는지 주변 사위가 조용해지고 다리 위로 지나가는 차소리가 큰소리로 들려온다. 이제는 다리밑에서 빗물에 젖어가는 젖은 마음을 정리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왜 늘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에 목말라할까. 무엇이 나를 다른 세상으로 거침없이 끌고 가는 것일까. 그리고 어쩌다 내 마음이 빗물이 이끄는 마음에 휩쓸려 이곳까지 흘러왔을까.


빗물이 거친 파도가 되어 내릴 때는 아무런 생각도 못하다가 비를 피해 다리밑에 앉아 내리는 빗물을 바라보니 온갖 상념이 떠오른다. 내가 빗물을 좋아하는 것일까 아니면 빗물이 나를 사랑해서 내리는 것일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아침에 나는 어쩌자고 세상을 향해 전영록의 '저녁놀'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일까. 오늘은 다리밑 의자에 앉아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신세지만, 다리밑에서 만난 고독한 세상이 참 좋다.


다리밑에 앉아 고개를 떨구고 서툰 손가락으로 글을 쓰며 생을 갈구하고 저녁놀 노래를 부르면서 그리움의 현율을 타고 내리는 빗물을 바라보며 둥지를 찾아가는 꿈을 꾸는 이 아침.


오늘이 가면 지금이란 시간도 가고 없지만 잠시 노래를 통해 다른 세상에 머물렀던 속절없는 마음과 따뜻한 빗물을 가슴에 안고 조붓하게 느껴본 고요한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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