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색 성장

by 이상역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가을을 위대한 계절이라고 노래했다. ‘가을이라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니 푸른 잎은 붉은 치마 갈아입고서…’.라는 ‘가을’의 동요처럼 솔바람과 붉은 치마를 입은 단풍이 물드는 계절이다.


여름의 무더위가 오는지도 가는지도 모르게 계절의 한구석으로 밀려나고 들판의 벼 이삭과 갈색의 낙엽이 갈 길을 서두른다.


봄에 꽃이 피는가 싶더니 벌써 단풍을 노래하는 갈색이 화두로 등장했다. 이제는 꽃과 더위를 노래하는 계절이 아니라 아름다운 색과 풍성함을 그리는 낯빛으로 변했다.


우리 곁에 머무는 시간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부지런히 흘러만 간다. 한낮의 태양 볕은 강렬해서 카뮈의 ‘이방인’ 뫼르소가 총으로 사람을 쏘았던 것처럼 무덥지만 왠지 여름날의 더위만은 못하다.


계절의 변화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묵언의 기다림이다. 그리고 기다림은 자연이라는 캔버스를 통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우리도 따지고 보면 자연의 한 부분이다. 우리가 자연을 가꾸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사람을 내려다보면서 우주 질서의 한 부분으로 가꾸고 보듬는 것이다.


우리는 계절이 가고 오는지 시간이 흐르는지도 모르고 자신의 갈 길만 부지런히 고집부리며 간다. 우리네 삶은 언제나 자연에 예속된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있듯이 세월은 지나고 나면 나를 돌아보는 시간의 톱으로 쌓여간다.


나도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서 몸을 풀어헤친 지 어느덧 햇수가 꽤 되었다. 이제는 가을의 낙엽처럼 내 몸도 낯선 곳의 색깔과 온도에 맞추어 변해가야만 하는데 아직도 진행형이다. 내 마음의 수양이 모자라고 부족해서일 것이다.


오늘도 집과 직장을 오고 가는 시계추와 같은 삶을 살아간다. 내 삶의 진정한 색은 어떤 색깔이고 어디로 흘러가는 존재의 강일까. 이런 의문은 시간이 흐를수록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늘어만 간다.


내가 사는 세상은 어지럽고 불안하고 초조와 긴장과 어리석음과 혼돈으로 가득하다. 이런 세상에서 무언가에 기대어 마음의 안식처를 찾아보려고 하지만 마땅하게 기대어 의지할만한 것도 없다.


하늘이 높아갈수록 두려운 것은 내가 지난 번성했던 시절에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위해 고군분투하며 삶을 쟁취하는 듯 살아왔는가에 대한 반성이다. 세월을 나무처럼 한 토막씩 잘라내어 그 속을 들여다볼 수도 없다.


우리는 시간을 단위로 쪼개어 성과를 가리려는 속성을 가진지라 그 잣대의 눈을 피할 수도 없다. 자연의 색깔처럼 사람의 마음도 색깔을 따라 성장해갔으면 하는 꿈을 꾸어본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지나간 시간이 새록새록 그리워진다. 봄날 꽃봉오리의 화사했던 모습과 지루하게 느껴졌던 뜨거운 태양 볕이 계절 속에 침잠하며 시간의 블랙홀로 빠져든다.


사람은 지나간 시간을 먹고 성장하는 존재가 아닐까. 계절이 바뀌는 시간이 찾아오면 사람은 앞으로의 시간보다 과거의 화려했던 것을 되돌아보며 아쉬워한다.


요즈음 신문이나 방송을 보면서 아쉬운 것은 나라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나 하는 의구심이다. 국민을 대표한다는 사람들이 정도가 아닌 다른 길과 잿밥에만 빠져 있어서다.


국민들은 과연 그들의 행태를 바라보며 무엇을 보고 배울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잡다한 상념만 가득 차오른다. 사색의 계절 가을처럼 그들도 가을에는 좀 더 성숙해져서 변화된 색깔로 삶을 이끌어갔으면 하는 소망을 그려본다.


가을은 지나온 시간을 반성하고 풍성한 결실을 맛보며 내적으로 성장을 다지는 계절이다. 그동안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려왔던 시간을 잠시 멈추고 미래를 가늠해 보는 계절이 가을이다.


이러한 반성의 시간을 갖게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닌 자연이다. 자연이 시간에 따라 색깔이 변화되면 사람도 그에 따라 과거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를 갖게 된다.


봄과 여름이 몸의 부피를 늘리고 성장을 드높인 계절이라면 가을은 성장의 부피를 내적으로 살찌우는 계절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내적인 성장을 위해 준비하고 가다듬어야 한다.


내적인 성장은 외적인 성장과 달리 바쁘게 서두르거나 시간에 쫓길 필요가 없다. 또 꽃을 피우기 위한 소쩍새의 가냘픈 울음소리도 소낙비와 같은 정열을 쏟지 않아도 된다.


가을이 시작되는 길목에 들어서면 내 마음은 언제나 고향의 들녘을 거닐었던 추억으로 가득해진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르른 창공과 바람에 이리저리 춤을 추는 들녘의 충만한 모습.


올 가을에는 이리저리 나를 내몰았던 바쁜 시간의 틈에서 벗어나 나를 성장시킨 지난 시간과 미래의 꿈을 태동시켜 준 따뜻한 고향에나 한번 다녀와야겠다.

keyword
이전 02화충만한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