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맑다는 것은 그늘이나 구김살이 없는 것이고, 해맑은 웃음이란 그늘이나 구김살이 없는 맑은 웃음이다.
요즈음 주말이면 몇 달 전에 태어난 손주를 보러 가는 것이 일과다. 아침에 세종에서 차를 운전해서 천안논산과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서울에 올라가면 오전 10시쯤 된다.
직장을 퇴직하기 전 세종에 근무할 땨는 서울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격주로 서울과 고향을 오고 갔는데 이제는 주말이면 으레 서울로 손자를 보러 올라간다.
주말에 연어처럼 서울로 회귀하는 것은 손주의 해맑은 웃음을 보고 싶어서다. 서울에 도착해서 딸네 먹을 것을 챙겨 들고 딸네집에 도착하면 손을 씻고 나와 손주가 잠을 자는지 깨어 있는지를 살펴본다.
그리고 손주가 깨어 있으면 손주와 얼굴을 맞대면하고 말을 하거나 표정을 지으면 손주가 해맑게 웃는다. 손주의 해맑은 웃음을 바라보면 지난 한 주간의 피로가 말끔히 씻겨나가고 삶의 엔도르핀이 솟구친다.
내 딸이 태어나서는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는데 나이 들어 손주가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보면 몸의 피로가 사르륵 녹는다. 손주의 웃음을 보는 것도 꽤 되었는데 손주의 웃음에 점점 빠져 들고 있다.
주말에 손주의 해맑은 웃음을 보고 나면 손주의 웃는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내 자식을 키울 때는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는데 손주가 해맑게 웃는 모습에 마력처럼 빠져 드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런 손주가 귀여워 분유를 먹이고 트림을 시키기 위해 한참 동안 이 방 저 방 안고 돌아다닌다. 손주를 안고 돌아다니면 손주가 손과 발을 버둥거리고 연신 고개를 돌려가며 온갖 것을 구경하려 한다.
손주를 안고 딸네 집을 돌아다니면 아내가 슬며시 다가와 손주를 어루만지며 웃음을 주고받는다. 그러고 보니 손주처럼 해맑게 웃어본지도 꽤 오래된 것 같다.
내가 웃는 모습과 손주가 웃는 모습은 어떻게 다를까. 내가 웃는 모습에서는 세상사에 찌든 그늘진 모습일 테고 손주는 세상사에 물들지 않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모습일 것이다.
뒤늦게 손주의 해맑은 웃음을 바라보며 삶이란 무엇인지를 제대로 배우고 느낀다. 집안에 아이가 태어나면 집안사람 모두가 아이를 바라보며 건강하게 웃으며 살게 되는 것 같다.
아이의 손짓과 웃는 모습에 "까르르까르르" 하는 행복한 웃음이 생산되고, 아이의 몸짓 하나에 "어머! 벌써"라는 신기함과 놀라움이 가족들에게 내일의 밝음을 선사해 준다.
딸은 매일 같이 손주가 웃는 모습이나 옹알이하는 모습을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카톡에 올려준다. 핸드폰을 들고 손주의 웃는 모습이나 몸동작을 바라보면 주중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낸다.
내가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 할머니도 지금의 내 마음과 같은 심정이었을까. 손주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의 유년 시절을 더듬어 본다.
손주가 태어나는 곳이 어디든 똑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이전 할아버지 세대는 사랑에 대한 표현이 부족했을 텐데. 어떤 방식과 몸짓으로 자신의 손주를 사랑해 주셨을까.
내 손주를 바라보며 나를 생각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걸어간 삶의 길을 생각하게 된다. 비록 화양연화 시절은 아니었지만 나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걸어간 길을 손주와 함께 걸어가야 한다.
과학과 의료 기술 발달로 사람의 수명이 연장되어 증손자 고손자까지 보는 세상이 되었지만 우리 집에 손주를 보게 해 준 딸에게 무한한 감사와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생명의 대를 잇는 일은 신성하고 신비한 세계의 일임에 틀림없다. 그런 신성하고 신비한 세게를 살아생전에 만나고 겪게 해 준 내 딸이 대견스럽고 기특할 뿐이다.
오늘도 주말이 언제 오나 하면서 손꼽아 기다린다. 연말에 크리스마스다 망년회다 송년회다 하는 번잡한 행사가 기다리지만 이들 행사는 제쳐두고 오롯이 손주가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보러 가는 날만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