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센 할아버지

by 이상역

"힘센 아이 낳지 말고 말 잘하는 아이 낳아라"라는 속담이 있다. 힘이 센 것보다 말을 잘하는 것이 처세에 훨씬 이로움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그런데 힘센 아이가 아닌 힘센 할아버지란 말이 맞는 말일까. 할아버지가 되면 근육과 활동량이 줄어들어 힘도 빠지게 마련인데 힘센 할아버지 대신 힘이 없는 또는 힘이 약한 할아버지란 표현이 맞는 것 아닐까.


집안에서 힘센 할아버지라고 불러주는 사람은 다름 아닌 손주다. 손주가 두 돌이 되어가는데 말도 제법 할 줄 알고 요리조리 눈치도 살펴가며 말장난도 한다.


힘센 할아버지로 불리는 순간은 손주가 자기를 안고 어디를 데리고 가달라고 할 때다. 두 돌이 되어가는 손주를 안고 데리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엄마도 할머니도 아닌 할아버지 밖에 없다.


그럴 때 손주는 엄마 눈치를 보다가 나를 바라보고는 그럼 힘센 할아버지가 자기를 안고 놀이방이나 공원에 데리고 가달라고 안긴다. 평소엔 본 척도 하지 않다가 자기가 필요할 때 데려가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 손주가 밉기도 하지만 어찌하랴 자기를 안고 나가 달라는데 그럴 때 힘센 할아버지가 되어 손주를 안고 놀이방이나 공원에 데리고 가서 놀다 온다.


외형은 할아버지로 불리지만 아직은 힘도 쓸 수 있고 손주를 안지 못할 만큼 힘이 없는 것도 아니다. 딸이 손주에게 자기는 힘이 없어 안지 못한다고 하면 손주는 돌아서서 나를 빤히 바라본다.


그러면 한참 동안 웃고 있다가 손주를 안고 밖으로 나와 놀이방이나 마트를 간다. 손주가 말을 하게 되니 심심하지 않아서 좋다. 슬슬 말장난도 하고 내가 말을 걸면 정반대의 말을 가차 없이 꺼내든다.


손주가 성장해서 말을 하게 되니 왼만한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손주를 낮잠 재우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밖에 데리고 나가는 것이 점점 힘들어진다.


몇 달 전만 해도 "삐요 삐요(구급차)"나 "쓰레기 차(재활용 트럭)"를 보러 가자고 하면 냉큼 달려와 안겼는데 최근에는 어떤 말로도 유혹할 수 없을 만큼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것이 어려워졌다.


어쩔 수 없이 유혹하는 수단을 매번 바꿀 수밖에 없다. 엄마를 마중 가자거나 놀이방에 가서 놀자고 하는 등 갖은 머리를 써서 손주를 데리고 밖에 나가 재우고 들어온다.


집에서 낮잠을 재우려면 좀 시간이 걸리는데 어깨띠를 두르고 밖에 나가 한 십여 분 정도 돌아다니면 잠이 든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손주도 볼 겸 낮잠을 재우러 간다.


어깨띠를 두르고 밖에 나가 손주의 낮잠을 재우는 일이 잦다 보니 나도 모르게 힘센 할아버지가 되었다. 손주를 안고 밖에 나가 자장가 삼아 노래 불러주고 손주가 가자는 대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 잠이 든다.


그렇게 잠을 잘 자는 손주가 왜 집에서는 잘 자지 않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쨌든 손주에게 힘센 할아버지로 불리게 된 것도 그나마 다행이다.


나이 들어 손주를 위해 할 일이 있으니 손주와 말도 하고 얼굴을 맞대고 노래도 부를 수 있으니 행복이 별거던가. 그나마 힘이 없어 손주마저 재울 수 없는 할아버지가 되었다면 손주에게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


아마도 손주를 보러 가도 손주가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지금도 딸이나 할머니랑 함께 있으면 할아버지는 삼 순위다.


할아버지가 손주에게 말을 걸면 무조건 반대로 말한다. 밥을 먹고 있다가 "밥 먹고 있어요?"라고 물으면 손주는 "안 먹어요"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밥이 맛있어요"라고 물으면 손주는 "안 맛있어요?'라고 대답하면서 빙그레 웃는다. 어떻게 배웠는지는 모르지만 말마다 안자를 붙여 쓰는 것이 그저 신기하다.


이상한 것은 안자를 붙여 쓴다고 말이 안 되는 것이 아니다. 손주가 안자를 붙여 말을 해도 그 상황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손주가 사춘기인지 점점 청개구리가 되어 가는 것 같다. 특이한 것은 최근에 손주가 자기 영역을 갖기 시작한 점이다.


지난번에 우리 집에 데리고 와서 단지 내에 트램펄린이 설치된 곳이 있어 데리고 가서 방방 뛰워주며 놀아주었다. 그런데 얼마 후 손주가 자기 손을 잡고 있는 내 손을 떼어내고 혼자 놀겠다며 나를 밀쳐내며 멀리 가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자기 혼자서 트램펄린에서 뛰어놀았다. 약간 위험해서 손주를 보호하려고 다가가면 오지 말라고 소리를 치며 나를 다시 밀어냈다.


손주네 집에서도 자기가 갖고 노는 장난감이 있는 곳에 가려고 하면 나를 오지 말라고 밀쳐내며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선다.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이 손주가 노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두 돌이 되어 가는 아이의 특징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이도 아이만의 독립된 공간을 찾으려 하는 것 같다. 사마귀가 호랑이 앞을 막아서듯이 손주가 나를 못 오게 온몸으로 막아서는 꼬락서니를 바라보면 웃음피어난다.


손주가 온몸으로 막는데 그것을 물리치고 들어갈 수 없어 뒤로 물러나서 손주가 노는 것을 바라만 본다. 벌서 손주가 독립된 공간을 그리워할 때가 된 것인가.


아이의 성장과정에 대한 특징과 징후를 모르니 가끔은 손주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의아할 때도 있고 왜 이런 행동을 할까 하는 것에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아무튼 손주도 속담처럼 힘센 아이보다 말 잘하는 아이로 성장했으면 한다. 할아버지가 힘이 세니 힘든 것은 할아버지가 맡고 손주는 말이나 잘해서 처세술도 배우고 세상에 잘 적응하고 집안에 웃음꽃을 선사하며 무럭무럭 성장하기를 바랄 뿐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본인상에 가린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