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밤에 담긴 사랑(수정)

by 이상역

풍성한 계절 가을이면 사랑이 담긴 알밤을 줍던 추억이 생각난다.


어린 시절 고향 초가의 장독대 옆 밤나무에서 떨어진 알밤과 산자락에 올라가 알밤을 줍던 기억이 난다. 내게 알밤은 어린 시절부터 장년기까지 사랑의 징검다리를 이어준 열매이자 사랑을 품게 해 준 자연의 선물이다.


엊그제 손주를 보러 가자 손주가 인사하더니 공원에 밤을 주으러 가잔다. 손주와 종종 공원에 올라가 놀아주며 밤나무가 서 있는 곳에 가서 밤송이를 바르는 것을 몇 번 보고는 밤을 줍자고 한다.


두 돌이 된 손주가 밤을 주으러 가자는데 아니 갈 수 없어 손주 손을 잡고 공원에 데려갔다. 공원은 언덕이 져서 올라가려면 힘든데 손주는 씩씩하게 앞장서서 걸어갔다.


공원에 올라가 밤나무를 찾아갔다. 며칠 전 손주와 왔을 때는 알밤이 보이지 않더니 이번에는 알밤 몇 개가 떨어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손주에게 밤송이를 치워주고 알밤을 주으라고 하자 작은 손으로 움켜쥐었다.


손주가 줍는 알밤은 그냥 알밤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이 담긴 알밤을 줍는 것이다. 손주의 손을 잡고 알밤을 줍는데 근 이십여 개를 주웠다.


밤을 주워 손주 바지 주머니에 넣어주고 딸네 집으로 향했다. 공원을 내려오는 손주의 얼굴에 싱글벙글 웃음꽃이 피었다. 손주에게 "알밤 줍는 것이 그렇게 좋아요?"하고 묻자 손주가 "네"하며 방긋방긋 웃는다


고향에는 아이들과 젊은 사람이 없어 산자락에 떨어진 알밤을 주워가는 사람이 없다.


휴일에 고향에 가서 산자락의 밤나무를 찾아가면 땅바닥에 밤이 수두룩하다. 바닥에 떨어진 밤을 정신없이 줍다 보면 비닐봉지에 가득 찬다.


고향에서 줍는 알밤에는 세 가지 맛이 들어 있다. 그 맛을 알면 밤을 즐겁게 줍고 맛있게 먹는다. 밤은 나무에 달린 밤을 바라보는 맛과 떨어진 것을 줍는 맛과 주운 밤을 쪄서 먹는 맛이 들어 있다.


밤송이에 매달린 밤을 바라보면 계절의 맛이 나고, 떨어진 밤을 주우면 풍성한 맛이 난다. 그리고 주워온 밤을 쪄서 먹으면 구수한 맛이 난다.


나는 밤을 주우러 갈 때 주로 새벽에 간다. 밤을 떨구어 주는 것은 밤나무가 아니라 바람이다. 밤을 주울 때 얼굴에 엷은 미소를 짓게 하는 것은 발 옆으로 밤알이 툭툭 떨어질 때다.


내가 고향에서 줍는 밤은 산자락에 떨어진 알밤을 줍는 것이 아니라 고향의 사랑과 정을 줍는 것이다. 고향의 사랑과 정을 자식에게 먹이고 빈 가슴에 사랑을 채우고 싶은 마음에 종종 알밤을 주우러 간다.


지난해 추석 고향에 가서 차례를 지내고 집으로 올라가려고 하자 어머니가 잠시만 기다리란다.


얼마 후 어머니는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알밤을 내놓으시며 가져가란다. 집에 가서 아이들과 쪄서 먹으란다. 어머니는 구순을 넘기셨고 잘 걷지도 못하신다.


그런 어머니가 지팡이 짚고 산자락 밤나무를 찾아가서 자식을 위해 알밤을 주워 놓고 자식이 좋아한다고 내민 것이다. 비닐봉지를 바라보면 알밤보다 알싸한 사랑의 눈물이 솟구친다.


어머니는 평생 농사지으며 자식에게 먹을거리를 내어놓는 것을 사랑이라 여기신다. 어머니가 밤을 줍는 것은 자식을 생각하며 줍는 사랑의 알밤이다. 그래서 알밤을 찌면 구수한 사랑이 파릇파릇 피어난다.


어머니가 주신 알밤을 가져와 밤 껍데기를 벗기는 작업도 정성을 들여야 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면 공을 들여야 하듯이 밤을 먹으려면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밤 껍데기를 까는 것이 귀찮아 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밤 껍데기 까는 것을 즐겨한다. 밤 껍데기를 까는 것도 참고 기다리는 인내의 시간을 가르쳐 준다.


어쩌면 내 삶과 닮은 것 같아 밤을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밤의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속살의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 두툼한 껍질과 까칠까칠한 것을 몸에 두르고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꺼리는지도 모른다.


공원에서 손주가 줍는 밤과 고향에서 내가 줍는 밤과 어머니가 줍는 밤에는 각기 다른 사랑을 품고 있다.


알밤의 껍질처럼 각기 다른 사랑이 가을의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을 내서 세대를 연결 짓고 사랑의 징검다리로 거듭 피어나기를 기원한다. 알밤의 세 가지 맛처럼 어머니와 나 그리고 나와 손주가 사랑의 알밤 맛을 그리워하며 세대 간에 포근한 정을 나누는 건강한 삶을 살고 싶다.


올추석에는 손주 손을 잡고 고향에 찾아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산자락에 올라가 밤나무에서 떨어진 알밤이나 주우며 어머니에게 그간 듣지 못한 고향 소식이나 전해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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