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시 먹어봤어

by 이상역

가을이 다가오니 나무에 달린 나뭇잎이 서서히 단풍으로 물들어 간다. 주변의 사방 어디를 바라봐도 나무와 산자락이 서서히 녹색의 기운을 벗고 자기 색깔을 찾아가는 것이 보인다.


가을이 좋은 것은 봄과 여름날에 정성 들여 키운 결실을 만나는 것이다. 나무마다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모습을 바라보면 마음이 풍성해진다.


어제도 낮에 잠깐 손주를 재우러 딸네 집에 다녀왔다. 손주는 낮에 누워서 잠을 재우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 그런데 어깨띠를 걸치고 가슴에 안고 밖에 나가 재우면 누워 재우는 시간보다 일찍 잠이 든다.


두 돌이 된 손주를 안고 밖에 나가면 손주는 잠은 자지 않고 이것저것 묻기 시작한다. 나무를 만나면 무슨 나무냐고 묻고, 풀을 만나면 무슨 풀이냐고 묻고, 꽃을 만나면 무슨 꽃이냐고 묻는다.


손주 덕에 나무나 풀이나 꽃이름을 배우고 있다. 손주가 물어보는데 그냥 나무다 풀이다 꽃이다라고 단순하게 대답하는 것은 성의가 없는 것 같아 일일이 무슨 나무다 무슨 풀이다 무슨 꽃이다라고 말해준다.


단지에 감나무가 있는데 그 앞에 이르러 감나무 이름과 감이 익으면 나중에 홍시가 된다고 몇 번 말해 주었더니 손주가 감나무를 만나면 감나무라고 말하고 감이 익으면 홍시가 되고 홍시를 먹어봤다고 내게 말한다.


감나무를 보고 감에 대한 서사를 말하는 것이다. 감나무에 달린 감이 익으면 홍시가 되고 밤나무에 달린 밤송이가 떨어지면 밤을 줍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손주를 재우러 밖에 나오면 세상살이가 재미있다.


손주와 단지를 돌아다니며 나무와 풀과 꽃이름에 대한 대화를 주고받다 보면 손주는 어느새 품에서 새근새근 잠을 잔다. 그런 손주를 안고 딸네 집에 들어가 재우면 두 시간 정도 잔다.


손주를 재우러 나오든 손주와 놀러 나오든 손주에게 단지 내 나무의 이름을 알려준다. 목련, 메타세쿼이아, 플라타너스, 박태기, 모과나무, 회양목, 쥐똥나무, 벚나무, 감나무 등을 가리키며 이름을 말해준다.


생각해 보니 손주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 자라는 나무가 꽤 많다. 느티나무, 단풍나무, 복자기나무 등 이십여 가지 나무가 자라는 것 같다.


손주가 나무 이름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무 이름을 말하면서 배우는 발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사람뿐만 아니라 나무나 풀이나 꽃이 자라고 그들마다 각기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각 개별적 존재들은 자기만의 특성을 갖고 한 세상을 살다 가는 것인데 그들 이름을 불러주고 그것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단순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닌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베우는 것이다.

주가 "홍시를 먹어봤어"라고 말하는 것은 홍시를 먹은 사실보다 감나무가 자라서 감이란 열매를 맺고 가을이 되어 시간을 기다리면 빨간 홍시를 먹을 수 있다는 과정과 시간을 알게 된다.


모과나무의 모과나 밤나무의 밤이나 은행나무의 은행 등에는 무수한 사연이 담겨 있다. 은행나무를 보고 그냥 은행나무라고 말하는 것보다 은행나무는 어떤 나무고 은행은 어떻게 맺고 땅에 떨어지는지 하는 서사를 말해주면 손주가 이해는 하지 못하더라도 마음에 은행에 대한 잠재된 이야기를 품게 된다.


단지 내 나무나 풀이나 꽃마다 사연 없는 것이 없듯이 손주가 살아가는 세상도 사연 없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세상을 살아가면서 서로가 서로를 알아주고 이야기해 주는 것은 삶을 이치를 배우는 것이다.


일주일에 몇 번 낮잠을 재우러 가는 데 갈 때마다 오늘은 무슨 나무나 풀이나 꽃을 보고 이야기를 해줄까 하는 시간이 마냥 기다려진다. 어제는 감나무 이야기를 해주고 단지를 돌다 상사화(相思花)란 꽃을 만났다.


상사화 꽃을 만나자 손주가 바로 질문을 한다. "무슨 꽃이야?"라고 묻길래 상사화 꽃이라고 상사화는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해 서로를 그리워하는 꽃이라고 말해주었다.


손주가 서로가 만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움이 무엇인지는 뜻은 모르지만 손주에게 이런저런 말을 해주니 조용히 듣는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한마디 덧붙였다.


상사병(相思病)은 마음에 든 사람을 몹시 그리워하는 데서 생기는 마음의 병이라고 말해주면서 나중에 커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좋아만 하지 말고 다가가서 용기 있게 좋아한다고 말하라고 가르쳤다.


손주가 상사화와 상사병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저 상사화를 만나서 꽃뿐만 아니라 상사병에 대한 의미와 사랑하는 방법까지 말해 준 것이다.


어떤 사물에 대한 서사를 말해주는 것은 아이들에게 좋다고 생각한다. 사물에 대한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서사 즉 이야기를 해주는 것은 사물 너머에 담긴 세상으로 다가가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이번 주는 손주의 낮잠을 재우러 갈 일이 더는 없을 것 같다. 다음 주에 가야 하는데 다음에 손주의 낮잠을 재우러 가면 어떤 사물에 대한 서사를 말해줄 것인지 하는 궁금증이 일고 그날이 마냥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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