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뜨락

by 이상역

아침 출근길에 차 안의 라디오에서 수잔 잭슨의 ‘에버그린’ 노래가 사랑의 전주곡처럼 잔잔하게 파도를 탄다. ‘에버그린’은 자신의 사랑이 사계절 내내 푸르름을 간직하며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란 감미롭고 정겨운 노래다.

여가수의 목소리에는 향수를 달래는 애절한 이끌림과 누군가에게 호소하는 듯한 분위기가 담겨 있다. 그런 기분에 젖어 들자 부산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덩달아 어설프게 콧노래로 따라 부르자 가슴에 무언가가 다가와 부딪치며 마음에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수잔 잭슨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따라 아련한 사랑과 그리움이 파도를 타며 마음을 일렁이게 한다.

삶의 주기가 마치 월요일에 시작되는 것처럼 출근길이면 사람들로 분주해진다. 다른 날보다 유독 월요일이 혼잡스럽고 부산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분주한 삶에도 사랑이 자라고 고독이 성장하듯이 월요일은 지난 한 주간의 바쁜 것을 매듭짓고 새로운 한 주의 시작을 알리는 분수령이다.


가을은 나무조차 자신의 변화에 스스로 놀라는 계절이다. 하룻밤만 자고 나면 숲의 색깔이 달라지듯이 나이가 더해갈수록 가을은 진한 고독을 품은 채 다가온다.


나뭇잎의 색깔도 바라볼 때마다 다르게 보이고,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도 바라볼수록 새롭기만 하다. 가을은 고독의 계절이란 말처럼 가을이 되면 고독과 그리움과 사랑이 시간을 따라 성숙해가는 느낌이 든다.

사람의 감정도 나이를 따라 변하고 익어가는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잔잔한 음악을 듣거나 삶의 물살을 담은 영상을 마주하면 그리움이란 단어가 불쑥불쑥 고개를 내민다.


가을이 내 마음을 애무해주는 것인지 내가 가을을 연인처럼 그리워하는 것인지 무엇이 먼저인지를 모르겠다. 눈가의 눈물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 억지로 웃어 보일 때마다 자신에 대한 의구심이 높아만 간다.


나이라는 유전자가 가슴의 애달픔을 퇴색시켜서 그러는 것일까. 가을밤이 깊어갈수록 그리움은 짙어만 가고, 하룻밤이 지나면 떠오르는 태양처럼 그리움을 성장시키는 계절이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에고의 표시이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고는 그리움이 싹트지 않듯이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은 참된 사랑의 뿌리가 자란다는 증거다.


잔잔한 호숫가의 연약한 갈댓잎이 바람에 서걱거리자 그리움이란 현의 선율이 천지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오늘은 혹여 옛 연인이나 친구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 그리움이 날마다 성장하는 가을. 가을이 여물어가는 숲에서 저 홀로 우는 새의 비련처럼 사람도 홀로 우는 외로움 뒤엔 무언가를 가슴에 품고 싶은 고독이 깔려있다.


옛 시절의 잃어버린 꿈을 되살리지 못하는 가을비의 영롱함. 아직도 부르지 못한 사랑의 어부가. 목놓아 애타게 부르다가 지쳐 부르지 못한 청춘의 희망가. 이 모두가 나를 성장시키는 그리움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삶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움만 층층이 쌓여가는 바벨탑과 같다. 가을밤을 날아가는 기러기의 외로움처럼 나이는 고독을 먹고 고독을 곱씹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다.


아파트 창문을 열어젖히면 가슴으로 마구 달려드는 소슬바람처럼 가을이란 계절의 뜨락에 서면 감정은 자꾸만 옛 기억을 되살리고 싶은 나락과 환상에 빠져든다.


소리 없이 내리는 가을비가 기억의 환생으로 태어나 잊을 수 없던 순간을 빗줄기 사이로 하나하나 되살려낸다. 사람의 마음은 생각이란 조각에 의지해 삿대를 젓는 방향으로 정처 없이 흘러간다.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머릿속의 흐름이 바뀔 때마다 흔들리는 감정의 바다로 여행을 떠나는 나그네와 다를 바 없다. 사막의 실크로드 문명을 찾아 나선 탐구자처럼 그리움과 고독을 찾아 떠나는 가을날 아침의 출근길.

초록에서 노랗게 물들어가는 은행잎의 애처로운 눈길. 누군가 찾아와서 자신의 자식을 털어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나뭇잎을 노랗게 불태우는 고독과 외로움.


진정 가을은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계절인가보다. 늘 마주하는 것에서 그리움이 잉태하듯이 일상의 삶에서 고독이 움트고 고독의 싹이 자란다.


내가 진정으로 부르고 싶은 에버그린은 무엇일까? 수잔 잭슨의 달콤한 노래처럼 영원한 향수를 담게 하는 목소리일까 아니면 지금껏 나를 변함없이 지켜주며 곁에서 머무르는 소망의 바람일까.


월요일의 분주한 아침에 유려한 팝송이 지나간 향수를 들추어냈다. 오늘따라 인생의 그리움과 고독을 찾아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은 아름다운 아침이다.

keyword
이전 19화발길이 가는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