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루봉에 맺힌 땀방울

by 이상역

고향에서 태어나 시골집 건넌방에 자리를 깔고 공부해보는 것도 처음이다. 지난 일 년 동안 부모님 농사일을 돕다가 건넌방에 앉아 책을 보려니 잠만 쏟아졌다.


처음에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 무슨 내용인지 머릿속이 멍해지면서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다친 봄부터 책을 덮고 농사일만 도왔으니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어차피 공부하는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책을 보다가 졸리면 그대로 누워 잠을 자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지나가자 공부의 틀이 서서히 잡혀갔다. 가끔 방에 앉아 공부하다가 졸리면 밖에 나가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고 들어와 책을 붙잡고 씨름했다.


부모님은 장날이면 장에 갔다 오시면서 종종 막걸리를 사 오셨다. 아버지는 공부하는 나를 불러 쉬엄쉬엄하라면서 술상을 차려 놓고 막걸리를 따라 주시곤 했다. 그런 날은 공부를 잠시 접고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내려왔다.


시골집의 건넌방에서 늦가을부터 공부해서 이듬해 봄 5월에 총무처에서 실시한 출입국관리직 시험을 보았다. 시험 전날 미리 서울에 올라가 하루를 유숙하고 여의도에서 시험을 보고 시골로 내려왔다.


시험 응시표에 적힌 답과 학원에서 발표한 정답을 맞혀보니 무난히 합격할 수 있는 점수대였다. 출입국관리직 합격자 발표 날 서울신문을 들고 이름을 찾아보니 합격자 명단에 들어있었다.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면접시험을 준비하다가 면접시험 전날 과천에 올라가 하룻밤을 여인숙에서 묵었다. 그날 여인숙에서 늦게까지 면접을 준비하다 이튿날 법무부에 가서 면접을 보았다.


다행히 그간 준비했던 것을 면접관이 물어서 면접도 무사히 마쳤다. 면접을 보고 나서 최종합격자 발표 날에 서울신문을 다시 펼치자 최종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찍혀 있었다.


최종합격자 발표 후 법무부에서 근무하고 싶은 곳을 적어내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일 순위는 김포공항 나머지는 다른 곳을 적었다. 이왕이면 서울에 올라가 직장에 다니면서 뿌리를 내리고 싶었다.


얼마 후 법무부에서 김포공항출입국사무소에 근무하라는 인사발령을 받았다. 법무부는 김포공항출입국사무소 인력을 보충하는 차원에서 합격자 대부분을 발령 냈다.


그런데 막상 김포공항에 근무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자 서울에 거처할 곳이 마땅치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여동생한테 신세를 지기로 하고 성내동에서 김포공항으로 출퇴근을 시작했다.


아버지가 무릎을 다치는 바람에 일 년간 부모님 농사를 도와드렸다. 공항버스를 타고 김포공항에 출퇴근하는데 그간 고생한 시간이 애증처럼 떠올랐다.


당시 아버지가 무릎을 다치지 않았다면 한해 일찍 시험에 합격해서 출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김포공항을 오가면서 내가 가는 이 길이 과연 운명의 길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삶의 무대가 시골에서 서울로 이동되자 바라보는 안목도 넓어졌다. 이제 어디를 가든 어떠한 환경에서도 적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런 생각이 들자 머릿속에는 희망이란 등불이 순서 없이 밀려왔다.


공무원은 경제적인 여유는 없을지 몰라도 먹고살기에 불편함은 없다. 기왕에 공직에 들어왔으니 좋은 생각과 좋은 꿈만 꾸면서 살기로 했다. 마치 앞을 볼 수 없는 길고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온 듯이 만감이 교차했다.


삶의 앞길이 새롭게 열리자 인생의 좌표를 새로 설정하고 미래를 향한 밑그림도 다시 그리게 되었다. 나는 희망이란 말을 좋아한다. 사람은 희망이 없으면 미래도 없다.


가슴에 희망을 품은 사람은 언제나 마음이 밝고 자신감이 넘친다. 반대로 가슴에 희망을 품지 않은 사람은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어둡고 자신감도 없어 보인다. 그만큼 희망이란 단어에는 꿈과 열정이 들어있고 어떠한 난관도 극복하겠다는 용기로 충만해진다.


이전에 읍사무소를 그만두고 근 7년 만에 다시 공직이란 사회에 복귀했다. 긴 공백에 따른 책임감과 생활에 대한 의무감이 어깨를 짓눌러왔다. 대학에 다니면서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던 직업에 대한 의무감과 압박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세상에 태어나 시험에 합격하는 것은 어렵고도 힘든 과정이다. 왜! 쉽고 편하게 갈 수 있는 직업의 길은 없는 것일까. 이 세상은 스스로 개척하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 견고한 벽이다.


그 견고한 벽을 깨트리고 무너트렸다는 생각이 들자 생의 의지가 샘물처럼 새록새록 솟아났다. 버스를 타고 김포에서 서울 시내로 들어오면서 머릿속에는 갖은 생각이 떠올랐다.


지난 과정을 돌아보면 쉽고 편한 길을 버리고 에돌아서 빙 돌아왔다는 생각에 어깨가 저절로 무거워졌다. 공무원 꼬리표를 달고 삶이란 기차에 두 번째로 탑승하게 되었다.


어쩌면 지금 가고 있는 길이 내면에 꼭꼭 숨겨진 마음의 다른 표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성내동에서 김포공항을 오가면서 다른 곁가지 생각은 접고 오롯이 공직이란 길을 향해 몰두하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시작한 공직의 길은 지금도 인생의 선로를 따라 돛대를 세우고 순항하는 중이다.

keyword
이전 08화내일을 위한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