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나는 이 문장을 듣자마자 팔짱을 끼고는 혀를 끌끌 차는 사람의 모습이 떠오른다. 타인을 깎아내리거나 비아냥거리려는 마음이 들린다. '어머, 난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닌데 그렇게 봤니?'하고 코웃음 칠 때 사용하는 숙어 표현처럼 문장 자체가 주는 이미지가 매우 부정적이다. 실제로 그렇게 쓰는 경우도 허다하니 그럴 법도 하다.
그런데 문장의 기원을 생각해 보면 이는 오히려 현실을 직시한 문장이다. 너무나도 정직한 말이다. 송충이 눈에는 솔잎만 보이고, 배고픈 이에게는 음식만 보이며, 화가 난 이는 열 받을 일만 보이지 않는가. 같은 시대에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지만, 저마다 다른 세상으로 오늘을 살아간다. 각자 중요히 여기는 것을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그려내고, 세상을 각색한다. 그래서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그 말이 내게는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과 기회의 말로 다가왔다.
뭐 눈엔 뭐만 보이니까 반대로 뭘 보고 살 지 결정해 이를 보기 시작하면 내가 원하는 뭐라도 되지 않겠는가.
결국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 집중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핵심이었다.
어느 부분에 초점을 맞출지 결정하면 내 세상은 다르게 펼쳐진다.
그렇다면 요즘 내 눈에는 어떤 게 보일까? 나는 나를 알아가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내가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았던 나의 취향과, 내 삶의 목적과 목표, 중요한 나의 가치관, 어떤 때에 불편해지는지, 버릇과 습관들, 장점과 단점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외부에 눈을 돌렸던 이십 대의 나는 슬쩍 자취를 감췄다. 그 대신 나를 바라보는 삼십 대가 찾아왔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게 지금 내 삶 속에서 중요해지면서 내게는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나 비판, 비난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고집 있다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
그런데 끈기 있다는 말도 듣기 시작했다.
나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오늘의 내가 기대된다. 내일의 나는 더 기대된다. 먼 훗날 성장해 있을 내 모습이 보인다.
나를 알아가는 데 집중하다 보니 타인의 평가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 눈에는 나만 보였으니까". 내가 집중하고 있는 건 더 이상 타인이 아니었다. 그러자 타인의 평가는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조금 더 고집스럽고 자신감 있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소리 내어 영어공부를 하거나, 출퇴근 시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내가 새로 시작한 일들이다. 가족들이 내 영어 발음을 듣고 비웃으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다음에 하기로 미루는 나를 지워냈다. 실제로 가족들이 비웃지도 않을뿐더러, 그게 더 이상 내 눈에 걸리적거리지 않았다. 그림 그리기 역시 마찬가지다. 낙서 수준의 그림을 보고 옆 사람이 힐끔거릴까 두려워서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던 지난날과는 작별을 고했다. 그림을 그리는 그 순간이 너무 즐겁고 행복하기만 할 뿐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들에 집중하고 그것에 몰두하다 보니 정말 주변은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주변의 시선이 큰 방해물로 다가오지 않았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경험을 매번 할 수 있었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나는 한껏 기뻤다. 내가 보고 싶은 세상을 정하고 어떻게 바라보고 그려나갈지 결정하기만 하면 된다는 쉽고도 편리한 방법이 내 삶에 등장했기에.